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여성 임원의 리더십] 백수정 현대캐피탈 이사 "스스로의 콘텐트 없다면 리더할 생각마라"

캐피털 회사는 여신전문금융회사다. 예금(수신)은 할 수 없고 대출(여신)만 전문적으로 한다. 업계 1위는 현대캐피탈이다. 이 회사에서 지난해 말 현대자동차그룹 유일한 여성 임원이 나왔다. 주인공은 백수정(40) 이사. 승진하던 지난해 말에는 30대였다. 컨설팅 회사인 부즈앨런해밀턴을 거쳐 2007년 9월 부장으로 입사해 3년 만에 '별'을 달았다. 백 이사를 최근 만나 어떻게 하면 대기업 임원이 그것도 초고속으로 될 수 있는지 물었다. -대기업 여성 임원은 드물다. 게다가 일찍 별을 달았다. 주변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을 텐데. "따가운 시선을 느끼지 못했는데…. 달리 생각하면 이젠 나 같은 사람이 나올 정도로 우리 정서가 바뀐 거 아닌가." -어떻게 하면 여성이 그것도 30대에 임원이 될 수 있나. 비결을 알려 달라. "여성이라는 데 의미를 두고 싶지 않다. 심심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역량과 성과를 인정받은 사람이 승진하는 것 아니겠나." -MBA를 했고 컨설팅 회사 출신인 게 도움이 된 것 같다(그는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대 MBA를 나왔다). "부정하지는 않겠다. 여자가 공채로 들어와 승진해서 임원 되는 게 흔한 일은 아니다. 다른 스펙이 필요하다. 그게 꼭 MBA일 필요는 없지만 MBA가 있으면 훨씬 도움되는 건 사실이다. 아직 우리 회사가 만들어진 지 20년이 안 됐다(현대캐피탈은 1993년 현대오토파이낸스로 출발해 99년 현재 사명으로 바꿨다). 조만간 공채 출신 여성 임원도 나올 거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말 인사에서 백 이사를 승진시킨 이유에 대해 "현대캐피탈 마케팅실장으로 근무하면서 브랜드 가치 제고에 큰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가 주도한 대표적인 마케팅 프로그램이 '현대캐피탈 인비테이셔널(Invitational)'. 2007년부터 시작된 스포츠.문화 마케팅 행사다. 2007년 랜스 암스트롱을 초청해 사이클 경기를 벌였고 2008년엔 체조 갈라쇼를 열었다. 지난해엔 한.일 남자골프 대항전을 개최했다. '생돈' 들여가며 이런 행사를 여는 건 캐피탈 회사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서다. '어쨌든 돈 놀이 하는 회사'라는 이미지는 현대캐피탈의 숙명이다. 백 이사는 이 숙명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다양한 스포츠.문화 마케팅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건. "지난해 9월 제주도에서 열린 한.일 남자골프 대항전이다. 날씨가 참 안 도와줬다. 대회 전 한 달간 제주도에 태풍이 세 번 왔다. 3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더라. 설치물도 제대로 설치 못 하고 날아갈까 봐 마음 졸이고. 그래도 하늘이 우릴 버리지 않았다. 대회 당일에는 비가 안 와서 무사히 행사를 마쳤다. 인비테이셔널은 처음에는 비인기 스포츠를 육성하자는 취지였다. 최근엔 범위를 문화로 넓혔다. 지난해 5월 올림픽공원에서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초청해 '파크 콘서트'를 열었다. 캐주얼한 클래식 공연이었다.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영국 4대 오케스트라다. 연주의 질은 클래식 공연장 수준인데 콘서트를 즐기는 관객들은 5월의 향기와 낭만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었다. 앞으로도 이런 행사를 자주 열 계획이다. 또 새로운 형태의 클래식 공연인 '스탑앤리슨(Stop&Listen)'도 확대할 거다. 말 그대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클래식 연주를 하면 길을 가다 멈춰 서서 즐길 수 있는 공연이다." -이미지 개선엔 성공한 것 같다. 그런데 돈이 많이 들겠다. 이런 행사를 여느니 돈을 아껴서 대출금리 낮추는 게 고객들에게 보답하는 길 아닐까. "캐피털 회사는 부정적 이미지를 안고 간다. 현대캐피탈은 돈 빌려주는 회사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도움 필요한 분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좋은 곳이다. 금리를 얼마로 할 것이냐는 우리 회사가 돈을 얼마나 쓰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자금조달 비용 신용도에 따른 대출 상환율 등 리스크 관리 측면에서 결정된다. 회사가 돈 많이 쓴다고 그걸 메우기 위해 고객들 대출금리를 올리는 건 아니다." -그래도 캐피털 회사가 너무 이벤트성 마케팅에 치중한다는 느낌이다. "이벤트가 아무래도 겉으로 보이다 보니 그런 느낌이 들 것 같다. 그런데 아니다. 최근에 중점을 두는 건 고객경험 관리다. 고객들이 현대캐피탈을 만났을 때 어떻게 느끼느냐에 신경을 쓰고 있다. 그래서 요즘 파이낸스숍(지점)을 고치는 중이다. 초반엔 금융상품은 마땅히 보여줄 게 없으니 디자인으로 승부했다. 고객들이 지점에 들어서면 '와우'라 말이 나올 수 있도록 지점을 알록달록 꾸몄다. 지금은 다시 금융회사 스타일로 바꾸고 있다. 대출받으러 온 고객들이 위압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사생활 침해를 받지 않도록 창구를 투명한 상담공간 형태로 바꿨다." 백 이사는 금융 쪽과 인연이 없다. MBA를 마치고 돌아와 인터넷 기업인 라이코스코리아에서 일한 뒤 컨설팅 회사를 다녔다. 컨설팅 회사에서도 주로 제조업 프로젝트를 맡았다. -금융이나 마케팅과는 인연이 없다. "마케터로 일해보고 싶었다. 입사 면접을 볼 때 '경력이 이런데 괜찮겠냐'고 회사에 물었다. 그랬더니 현대캐피탈은 '유나이티드 스테이트 오브 커리어(United States of Career.직업합중국)'라고 하더라." -유나이티드 스테이트 오브 커리어? "예를 들어 우리가 VIP 서비스를 한다고 치면 금융권에 있던 사람보다는 호텔에서 VIP를 상대하던 사람이 더 잘 하지 않겠나. 이 회사엔 금융회사 특유의 순혈주의.배타성이 없다." -어떤 리더십을 지향하는가. "콘텐트 리더십이다. 권위적으로 '나를 따르라'식의 리더는 아니다. 리더가 누구냐. 구성원들이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해 주는 사람이다. 직원들에게 제대로 된 가이드 라인을 주고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그러려면 리더 스스로가 뭔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콘텐트 리더십이다." -임원을 꿈꾸는 여자 후배들에게 한마디.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고 싶다면 당연히 노력해야 한다. 여자라고 봐줄 거라고 기대하지 마라." 고란 기자 neoran@joongang.co.kr

2011-02-10

[여성 임원의 리더십] 윤서진 리딩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기업의 벽 허물고 진화하는데 애널은 벽 쌓고 반쪽 보고서 내놔 첫 여성 리서치센터장, 브로커 출신…지난해 말 음반 발매, 25일 공연" 주식시장은 동물의 왕국이다. 적자생존의 법칙이 지배한다. 남성호르몬이 넘친다. 미국 월가도 남자들 세상이다. 영화 '월스트리트-머니 네버 슬립'에 등장하는 시장 주변 인물은 죄다 남자다. 자본시장의 역사가 짧은 국내는 더 하다. 증권업계를 통틀어 여자 임원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국내 증권사 여성 리서치센터장도 지난해 7월에야 처음 나왔다. 윤서진(42) 리딩투자증권 이사다. 그런데 '첫 여성 센터장'에 가려 그의 출신성분이 묻혔다. 윤 이사는 첫 여성 센터장인 동시에 첫 브로커(주식거래 중개인) 출신 센터장이다. 애널리스트로 일한 적이 없다. 여성인 데다 브로커 출신인 그를 업계에서는 "전문성이 부족하다"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센터장 취임 후 반년이 지난 지금 상황이 바뀌고 있다. 기존 방식과는 다른 리서치센터 운영이 화제가 되고 있다. 최근 만난 윤 이사는 "기업은 업종을 넘나들며 진화하는데 애널리스트는 자신의 담당 섹터(업종)를 고집하며 반 쪽짜리 리포트를 내놓고 있다"며 "장기 투자자를 위한 종합적인 보고서를 내놓겠다"고 말했다. -새로운 보고서를 내겠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리딩투자증권은 규모가 작다. 후발주자다. 남들처럼 해서는 거들떠보지 않는다. 틈새를 공략해야 한다. 우리 회사의 목표는 장기 투자하는 기관투자가들을 위한 '니치(niche) 플레이어'가 되는 거다. KT를 볼 때 통신업종의 하나로만 봐선 안 된다. IPTV 사업 등을 보면 콘텐트 업종 측면에서도 검토해야 하는 식이다." -쉽게 설명해 달라. "2000년대 중반 외국계 증권사에서 브로커로 일할 때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당시 그곳 리서치센터가 인력 이탈 등으로 제 구실을 못했다. 브로커인 내가 알아서 종목을 발굴하고 투자자에게 아이디어를 줘야 했다. 그때 제일모직이 눈에 들어왔다. 섬유회사에서 시작해 화학회사로 변신한 상태였다. 애널리스트도 화학 담당이 맡았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께 제일모직의 패션 부문에 변화가 있었다. '빈폴'이라는 브랜드가 뜨면서 한국판 '폴로'로 성장하고 있었다. 매출이 늘고 그쪽에서 이익이 나왔다. 화학 애널리스트한테 '의류 쪽도 보면 좋겠다'고 얘기했더니 '그거 해봤자 아닌데'라며 무시하더라. 그래서 '그럼 빈폴을 입어보기는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브랜드가 있는지도 모르더라. 애널리스트가 그런 식으로 나오니까 대책이 없었다. 기관투자가들에 제일모직 패션 부문의 성장성을 알려주려고 패션쇼 티켓을 직접 구해 함께 갔다.(※2005년 2만원 안팎이던 제일모직 주가는 현재 12만원 안팎으로 여섯 배 뛰었다.) 지금은 전기재료 쪽으로 사업 영역이 진화했다. 애널리스트가 자기 섹터에만 담을 쌓고 있으면 반 쪽짜리 리포트밖에 못 쓴다. 앞으로 기업의 진화를 온전히 커버하는 리포트를 내놓는 게 목표다." -올해 주식시장을 전망해 달라. 코스피지수가 얼마까지 갈 것 같나. "말하지 않았나. 우리는 장기적으로 투자하는 기관투자가들을 위한 보고서를 쓴다. 10년 투자하는 이들에게 당장 6개월 뒤의 지수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우리는 투자 아이디어를 찾아 적합한 몇 개 종목을 고르고 그걸 점검하는 일을 한다. 예전에 브로커를 할 때도 지수가 아니라 '윤서진의 2011년 쇼핑 리스트' 이런 식으로 종목을 추천하고 왜 그런지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했다. 단기 지수를 전망하는 건 우리 아니어도 하는 데가 많다. 목표주가 정해 놓고 매수.매도 추천하는 것도 안 한다. 6개월 투자하는 사람에게 LG화학 주가가 지금 비쌀지 모르겠지만 3년 투자하는 사람에겐 지금이 매수 기회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수 전망도 안 하고 종목도 몇 개만 보고… 장사가 되겠나. 게다가 정식 애널리스트도 센터에 4명밖에 없다는데. "영업 대상을 국내외 장기 기관투자가 각각 6곳으로 잡았다. 철저히 이들 위주로 보고서를 쓸 거다. 애널리스트 인력이 적은 건 우리 보고서가 다른 곳처럼 섹터를 나눠 대상 종목에 대한 분석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섹터별로 애널리스트를 둘 필요가 없다. 그렇게 운영하기엔 몸값이 감당 안 된다. 대신 어떤 업종을 글로벌 측면에서 깊이 있게 보겠다면 전 세계에 있는 독립리서치회사(IRP)를 활용하면 된다. 이들은 독립기관이기 때문에 증권사 눈치 안 보고 보고서를 쓴다. 글로벌 정보기술(IT) 업종 측면에서 삼성전자를 분석하겠다면 IT에 정통한 IRP에 분석을 맡긴다. 대신 한국 상황을 잘 모를 수 있어 우리가 주제와 아이디어를 준다. 리서치 인력을 아웃소싱하는 셈이다. 이렇게 하면 자동차 부품주를 분석할 때 LG화학까지 포괄해 볼 수 있는 종합적 시각이 담긴 리포트를 내놓을 수 있다." -장기로 투자하겠다면 뭘 추천하겠나. "LG생활건강.신세계.제일기획.LG화학.아모레퍼시픽 등이다. 난 무엇보다 최고경영자(CEO)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LG화학에 김반석 부회장이 왔을 때 그를 중심으로 인재들이 몰렸다. 구조조정을 하고 뚝심 있게 핵심사업을 밀어붙이고. LG생활건강은 그야말로 'CEO 르네상스'를 열었다. 음료 부문도 자리를 잡았고 중국 사업은 페이스샵 인수로 돌파구를 마련했다. 아모레퍼시픽 서경배 사장의 경영능력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기업이 새로운 걸 이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수를 줄이는 게 더 중요하다. 기업에서 실수는 곧 돈이다. 그런데 신세계는 경쟁사에 비해 실수를 덜한다." -여성 센터장으로 일하는데 어려움은 없나. "첫 직장생활을 1995년 삼성 비서실 인사팀에서 시작했다. 대졸 여성이 나를 포함해 딱 두 명 있었다. 어렸을 적 아버지(※윤방부 가천의대 부총장) 따라 해외에서 살고 학교를 다녀 그 문화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한번은 '왜 여사원은 있는데 남사원은 없느냐'고 상사에게 물었더니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더라. 지금은 10원 먹자고 달려들어 접대하는 그런 영업을 안 하기 때문에 여자라고 손해 본 일이 없다." -지난해 말 음반을 냈다. "꿈이 가수였다. 그렇지만 살다 보니 꿈은 희미해졌다. 그러다 2008년 금융위기가 오고 난리가 났을 때 너무 몸이 힘들어 휴가를 내고 집에서 쉬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 정말 행복한 게 뭔지. 심장을 뛰게 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가수의 꿈이 떠올랐다. 당장 학원에 등록해 재즈를 배웠다. 선생님에게 칭찬도 들었다. 음반을 내자는 제안에 지난해 가을 주말을 이용해 녹음을 마쳤다. 12월에 '섬씽 굿(Something Good)'이라는 음반을 냈다. 수익금은 서울시장애아동사회적응지원센터에 후원금으로 내놓는다. 25일에는 홍대 재즈클럽인 '클럽 오뙤르'에서 공연할 예정이다."  고란 기자

2011-01-20

[여성임원의 리더십] 강유진 아이큐박스 사장

플레이모빌 유통, 키즈카페 운영…아동 도서출판 삼성당 셋째 딸 "장난감 매장은 쇼핑 인프라…월급 제때 주는 게 경영 철칙" 인구구조의 변화는 산업 지도를 바꿔놓는다. 부동산 가격의 하락과 주식시장의 대세 상승을 말하는 이들의 단골 메뉴도 인구구조의 변화다. 그래서 장난감 회사의 미래는 불투명해 보인다. '애들'이 줄어드는 데 도리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강유진(37) 아이큐박스 사장은 생각이 다르다. 아이큐박스는 플레이모빌.브리오.토이로얄 등의 완구를 수입.판매하는 회사다. "출산율은 고민거리가 아니에요.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이니까 혹은 조카에게라도 더 좋은 것을 사주고 싶어 하죠. 출산율이 고급 장난감 매출에 미치는 영향은 별로 없어요." 아직 미혼인 그가 장난감 사업에 한마디 하는 게 미덥지 않다. "화장품이나 여성복 회사 사장이 모두 여자는 아니지 않으냐"고 반문하는 강 사장. 알고 보니 유아.아동 교육도서로 유명한 삼성당 그 창업주의 셋째 딸이다. 집안 분위기 덕분에 자연스레 아동 관련 사업에 눈에 트였는지 모르겠다. 장난감을 다루다 보니 '철이 덜 든 듯' 또래보다 어려 보이는 그를 만나 장난감 사업과 국내 완구 시장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저출산이 문제가 아니라면 장난감 회사의 위협 요소는 뭔가. "게임회사다. 다른 완구 회사가 문제 아니다. 게임이 더 큰 문제다. 닌텐도가 나온 후 장난감에서는 손을 떼는 애들의 연령대가 낮아졌다. 예전에는 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애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지금은 다섯 살이면 다들 게임기 가지고 논다. 최근엔 아이패드다 해서 모바일 기기 애플리케이션까지 경쟁 상대다. 오프라인 완구를 모바일 기기와 접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 딸이 사업을 물려받았다. "남동생이 삼성당 대표(강진균)로 있다. 아이큐박스는 1988년에 설립된 삼성당 계열사다. 94년 법인으로 전환된 후 수익성이 없어 사업을 아예 접으려고 했다. 장난감 사업을 포기할 수 없어서 내가 맡겠다고 나섰다. 2006년 내가 대표이사가 되면서 계열 분리했다." -왜 장난감 사업인가. "장난감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 누구나 어린 시절은 있기 마련이고 어린 시절은 항상 장난감과 함께 한다. 인생을 살면서 어린이로 머무르는 시간은 고작 5년이다(※3세부터 입학 전 7세 정도까지).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추억을 안겨주고 싶다. 우리가 수입하는 완구 중 '브리오'라고 있다. 125년 역사를 자랑하는 스웨덴 왕실 지정 완구다. 거기 슬로건이 이렇다. 'It's not a toy. It's childhood.(브리오는 장난감이 아니라 어린 시절 그 자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나." -가장 애착이 가는 장난감은 무엇인가. "플레이모빌이다. 실제 20~30대 여성들 가운데 플레이모빌을 수집하는 사람도 많다." -어렸을 적 '플레이모빌은 내 친구 내 친구 플레이모빌…'이라는 그 광고 속 장난감을 말하는 거냐. "플레이모빌은 74년에 설립된 독일 회사에서 만든 장난감이다. 2.5인치 피규어(모형)로 온 세상 어린이들의 친구가 됐다. 플레이모빌 피규어의 얼굴에는 코가 없다. 애들이 사람 얼굴을 그릴 때 눈과 입만 그린다는 점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제품을 만들 때는 피규어를 먼저 만들고 그 피규어가 속한 주변 환경을 만든다. 예를 들어 환자나 의사 피규어를 만들고 병원을 만드는 식이다. 사람들이 레고와 헛갈리는데 레고는 블록이다. 레고가 조립 과정 자체를 즐기는 거라면 플레이모빌은 조립을 끝내고 난 뒤 역할 놀이 하는 데 의미를 둔다. 한국에서는 영실업이 80년대 플레이모빌 국내 제조.유통권을 사서 '영플레이모빌'이라 이름 붙여 팔았다. 그런데 90년대 플레이모빌 본사에서 품질 관리가 안 된다는 이유로 각국에 줬던 제조권을 거둬들였다. 국내에서 플레이모빌이 자취를 감췄다. 2002년 아이큐박스를 통해 다시 들어왔다. 2007년엔 독점 계약을 따냈고. 어릴 때 TV에서 광고를 보며 자란 세대가 지금 플레이모빌 매니어층이 됐다. 국내 키덜트(*아이 같은 어른) 시장에서 완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700억원(2008년 기준) 정도 된다. 국내 플레이모빌 매출에서 성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의 4분의 1 수준이다." -미혼이다. 아이도 없는 사람이 장난감 사업을 하는데 상품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는 것 아니냐. "그 논리라면 기업의 최소 절반은 여자가 사장해야 하는 것 아니냐. 아이큐박스 자회사로 '인더스토리'가 있다. 일종의 키즈카페를 운영하는 곳인데 이게 아이큐박스와 시너지 효과를 낸다. 여기에 우리 장난감을 갖다 놓아 애들 반응을 살피고 키즈카페에는 차별화된 장난감을 놓아 애들 만족도를 높일 수 있다." -인더스토리 키즈카페가 백화점에 들어가 있다. 수수료 빼고 나면 수익이 남나. "평당 수익으로 따지면 백화점은 여성 의류로만 채워져야 할 거다. 완구 매장은 다른 업종과 경쟁이 안 된다. 돈이 안 되니 푸대접 받고. 해외 백화점의 완구 매장은 우리의 최소 다섯 배다. 유럽은 한 층의 절반이 완구 매장이고. 완구박람회가 열리는 2월이면 독일 백화점 1층 쇼윈도도 완구가 차지한다. 완구 매장이 충분히 확보가 안 되니까 키즈카페가 필요한 거다. 키즈카페만 놓고 돈을 얼마를 버느냐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키즈카페는 쇼핑을 위한 인프라 시설이다. 2007년 3월 신세계백화점 경기점이 문을 열 때 백화점 측이 300평에 이르는 어린이 시설 공간을 만들고 싶어했다. 그걸 우리가 따냈다. 인더스토리의 슬로건이 '엄마에게는 자유를 아이에게는 재미를(free for Mom fun for Kids)'이다. 단순히 키즈카페를 운영하는 게 아니라 엄마와 아이를 위한 '복합문화 비즈니스'가 우리의 사업 목표다. 다행히 백화점 측도 과거보다 이해를 많이 해 준다. 완구 매장과 키즈카페가 백화점 수익 전체에 미치는 연관 효과에 대해서도 생각해 주고. 우리나라 소득 수준이 높아져서이기도 하겠지만 추측건대 백화점 오너의 자녀들이 3~7세가 된 것도 이유가 아닐까 싶다." -올해 실적은 어떻게 전망하나(인더스토리를 제외한 아이큐박스의 지난해 매출액은 41억원이다). "10% 가까이 성장할 것으로 본다. 45억원 수준이다. 외형적 성장보다는 이익 중심의 내실 있는 성장을 하겠다. 그래서 수익이 안 나는 곳의 백화점 점포는 철수했다. 온라인 쇼핑몰을 통한 매출 비중도 늘려갈 생각이다. 그리고 백화점보다는 저렴한 상품을 할인점에 공급해 사람들이 쉽게 아이큐박스 장난감을 접할 수 있도록 하겠다." -장난감 회사이기는 하지만 여자로서 사업하면서 어려운 점 없었나. "직원들하고 함께 사업체 첫 미팅 자리에 가면 상대방이 나를 과장이나 차장급으로 보고 말을 한다. 그러다 진짜 실무자인 차장이 들어와 나를 사장이라고 소개하면 상대방이 굉장히 당황한다. 그럴 땐 내가 더 미안하다.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오히려 더 친해진다. 우리 회사를 더 잘 기억해 주기도 하고. 술을 마시거나 접대는 못하지만 안부전화나 문자 트위터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친해지려고 노력한다." -아버지에게 받은 경영 철학이 있다면. "아버지로부터 특별히 경영 수업을 받은 적 없다. 그러나 내가 반드시 지키는 아버지의 경영 원칙이 있다. 직원 월급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때 준다는 거다. 예전에 회사 공장이 불타버렸는데도 아버지는 직원들 월급을 챙겨줬다. 나도 직원 급여는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월급을 받아야 일할 마음이 생기고 그래야 회사가 제대로 굴러갈 것 아니냐. 다행히 아직까지 월급 밀려본 적 한 번도 없다. 난 자수성가한 아버지를 존경한다. 힘든 결정을 해야 하거나 위기가 왔을 때는 '아버지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존재가 내 안의 답을 찾는 걸 도와준다." 고란 기자 neoran@joongang.co.kr

2010-11-04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여성 임원의 리더십] 손병옥 푸르덴셜생명 부사장 겸 여성 임원 모임 WIN 회장

5년 만에 부장→전무 고속 승진…한국 생보사 최초의 여성 부사장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기업도 성공하고 직원도 행복해 지난달 20일 오후 일본 도쿄 게이오플라자호텔. '여성을 임원실로 보내자'는 주제의 토론회에 손병옥(58) 푸르덴셜생명 부사장이 한국을 대표해 지정 토론자로 나섰다. "한국이나 일본 여성이 소극적이고 얌전하다는 것은 편견입니다. 앞으로 세상은 소프트파워를 지닌 여성들이 우위에 설 것입니다." 손 부사장의 거침없는 발언에 200여 명의 청중은 일제히 박수로 화답했다. 이날 토론회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여성 리더스 네트워크(Women Leaders Network) 회의의 일부로 일본 여성단체인 J-WIN(Women's Innovative Network)이 주관했다. 주로 직장 여성들이 미래의 리더를 꿈꾸며 앞서간 선배들의 경험담과 조언을 듣는 자리였다.  손 부사장은 추석 연휴를 바쁘게 일본에서 보내고 24일 오전 서울 역삼동 푸르덴셜생명 본사로 출근하자마자 중앙SUNDAY와 만났다. 그는 "여성들이 일과 가정을 병행한다며 일에 50% 가정에 50% 하는 식으로는 양쪽 모두에서 패배자가 되고 만다"며 "일에도 100% 가정에도 100%의 최선을 다하되 시간관리에 철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수퍼우먼이 되거나 여성다움을 버릴 필요는 없다. 여성 특유의 배려하는 마음과 섬세함.유연함은 21세기 리더의 필수 덕목이므로 적극적으로 키우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3년 국내 생명보험업계 최초의 여성 부사장이 된 그는 현재 최고운영책임자(COO)로 보험영업을 제외한 인사.재무.투자.교육.홍보.준법감시 등 경영지원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현재 근무하는 직원들은 거의 다 내가 인터뷰해 뽑았다"는 손 부사장은 직원들 사이에서 '푸르덴셜의 어머니'로 불린다. 2007년부터는 한국 여성 임원들의 모임인 WIN(Women in Innovation www.win.or.kr)의 회장으로 차세대 여성 리더 육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지난 7월에는 여성 친화적 기업문화 조성과 여성 리더십 향상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푸르덴셜이 여성 친화적 기업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어떤 점이 특별한가.  "없다."(미소 지으며)  -없다니 무슨 말인가.  "특별한 게 없다는 얘기다. 생각해 보라. 여성 우대 제도나 혜택이 있다는 자체가 여성에 대한 차별이 존재한다는 방증이다. 남성이냐 여성이냐를 떠나 모든 직원에게 능력에 따른 동등한 기회를 보장하면 그런 제도가 필요없다. 진정한 여성 친화는 차별도 우대도 없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여성들은 육아와 일을 병행하느라 힘든 점이 있을 텐데.  "산후휴가나 육아휴직 등은 당연히 법에서 정한 대로 시행한다. 그 밖에 육아 문제로 급한 사정이 생기면 근무시간을 유연하게 조정해 준다. 예컨대 자녀가 다니는 학교에서 급식당번이 돌아왔다고 하자. 그러면 학교로 가라고 한다. 간혹 못 가게 하는 회사도 있다고 들었다. 잘못하는 거다. 회사가 직원을 배려해야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생긴다. 그런 사람이 일도 더 열심히 한다."  -'유리천장'이란 말처럼 여성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있지 않나.  "나는 유리천장을 믿지 않는다. 과거에는 모르겠지만 21세기에 유리천장을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다. 중요한 것은 능력이다. 어느 고용주인들 능력 있는 직원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쓰지 않겠나. 물론 한국 기업들이 외국에 비해 환경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주저앉으면 안 된다. '기회의 문'은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열린다."  -WIN의 회장을 3년째 맡고 있다. 어떤 단체인가.  "국내 기업과 다국적 기업의 여성 임원 120여 명이 참여하는 모임이다. 사적인 만남이 아니라 정식으로 여성가족부의 사단법인 인가를 받았다. 어렵게 임원 자리까지 올라온 여성들이 후배들을 위해 뜻깊은 일을 해 보자며 2007년 11월 창립했다. 취지에 공감해 첫 모임에 갔더니 뜻하지 않게 회장으로 추대받았다. 처음엔 가슴이 덜컥했는데 하면 할수록 중요한 일이란 확신이 생긴다. 언젠가 은퇴하면 이 일에 매진할 생각이다."  -WIN에서 주로 하는 활동은.  "가장 역점을 두는 활동은 1년에 두 차례 여는 '차세대 여성 리더 콘퍼런스'다. 현직 여성 임원들과 중간 관리자급 여성들을 멘토-멘티로 엮어 주는 자리다. 여성은 아무래도 남성에 비해 인적 네트워크가 부족하기 쉬운데 그런 점을 보완하고 롤모델을 제시한다. 직장생활에서 생기는 각종 고민거리도 진지하게 상담해 준다. 올해는 5월에 이미 한 번 했고 다음 콘퍼런스는 11월 22일에 개최할 예정이다." "자신의 운은 자신이 만든다"  손 부사장은 1974년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체이스맨해튼 은행의 서울지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70년대 초반은 대졸 여성이 직장에 다니려면 상당한 용기와 각오가 필요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딸의 취직을 반대하던 어머니는 "3년 넘게 다니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장담했다고 한다. 그러나 "집에만 있을 순 없었다"는 손 부사장은 어느덧 30년 넘게 직장 일을 하며 성공한 커리어우먼으로 후배들의 롤모델이 되고 있다. 96년 푸르덴셜생명에 인사담당 부장으로 합류한 이후에는 1~2년마다 이사.상무.전무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성공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맡은 일은 누구보다 잘하려고 했다. 그런 내 모습을 상사들이 좋게 본 것 같다"며 겸손한 답을 내놨다.  -푸르덴셜생명에는 어떻게 오게 됐나.  "은퇴한 제임스 최 스팩만(한국 이름 최석진) 푸르덴셜 회장과의 인연 덕분이다. 그분은 체이스맨해튼과 HSBC은행에 근무할 때도 상사로 모셨다. 당시 주미대사관 상무관으로 근무한 남편을 따라 3년간 미국에 살면서 직장을 그만둔 상태였다. 다시 일을 구할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스팩만 회장이 불러줬다. 급여도 직급도 묻지 않고 무조건 '예' 하고 따라 나섰다."  -국내 생명보험사에서 여성 부사장은 처음이었다.  "사실 영업이나 상품 개발 같은 정통 보험 업무가 아닌 후선 업무를 해 왔다. 그래서 '업계 최초'란 말이 조금은 부담스럽다. 하지만 보험 분야의 후배 여성들에게 동기 부여가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기쁜 일이다. 항상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조직이 성공한다'는 믿음을 갖고 최선을 다해 행복한 회사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승진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왔다. 언젠가 스팩만 회장에게 '저처럼 운이 따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라고 했더니 'You made your own luck(당신이 자신의 운을 만들었다)'이라고 한 말을 잊지 못한다."  -리더를 꿈꾸는 후배 여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BC'를 기억하고 '그만병'에 걸리지 말아야 한다. A는 ambitious 즉 꿈을 크게 세우라는 것이다. B는 brave 두려워하지 말고 C는 confident 자신감과 믿음을 갖고 넓은 세상을 무대 삼아 꿈을 펼쳐야 한다. 그만병은 '이제 그만(이만)하면 됐다'는 나약한 생각을 말한다. '여기까지 해 봤으니 됐어' 하는 것은 금물이다. 한국을 넘어 글로벌 리더를 목표로 끝없이 노력해야 한다." WHO? 1952년 부산생. 경기여고·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대학교수가 꿈이었으나 취업으로 진로를 바꿔 체이스맨해튼·미들랜드·HSBC은행 등 외국계 은행에서 근무했다. 금융 관련 전문지식을 얻기 위해 직장을 다니며 서강대에서 경영학 석사(MBA) 과정을 마쳤다. 93년 주미대사관 상무관으로 발령받은 남편을 따라 미국에 가면서 직장을 그만뒀다. 남편은 중소기업청장과 무역협회 상근부회장을 지낸 고(故) 이석영씨다. 미국 생활 중에는 조지메이슨대에서 영어교수법(TESL)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96년 푸르덴셜생명에 인사부장으로 영입됐다. 이후 이사·상무·전무를 거쳐 2003년부터 부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2007년 11월부터는 여성 임원 모임인 WIN 회장도 맡고 있다. 주정완 기자 

2010-10-07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여성 임원의 리더십'] 26년 전통 신라명과의 개혁 이끄는 홍수현 브레댄코 이사

'제빵왕 김탁구' 13회까지 협찬…제빵업계 유일한 기술명장 보유 신라명과 새 브랜드 브레댄코 론칭…2년 만에 가맹점 50여 곳 확대 최근 시청률 50%에 육박하며 큰 인기를 끌고 있는 TV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한 장면. 3회에서 거성식품 구일중(전광렬 분) 회장은 어린 탁구(오재무 분)와 마준(신동우 분)을 데리고 자신이 운영하는 빵공장을 방문했다. 공장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구 회장은 아이들에게 숙성된 밀가루 반죽 네 개를 보여주며 질문을 던진다. "네 개 중 하나만 빵을 만들기에 적당하게 숙성 발효된 것이다. 알아맞힐 수 있겠느냐." 코를 가까이 대고 반죽의 냄새를 맡아본 탁구는 "이 중엔 없는 것 같다"고 답한다. 이어 "회장님 작업실에서 맡았던 맑고 시큼털털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토로한다. 구 회장은 탁구를 대견스럽게 바라보며 "작업실에선 라이브(생) 이스트를 썼지만 공장에선 유통기한 때문에 드라이(건조) 이스트를 쓴다"고 설명해 준다. 드라마의 막이 내리자 장소협찬의 첫 번째로 '브레댄코(bread&co.)'란 제빵업체의 로고가 등장한다. 13회까지 공장 등 드라마 촬영장소와 제품을 지원하고 주인공 탁구역 윤시윤 등 배우들에게 제빵.제과기술을 가르친 회사다. 브레댄코는 1978년 호텔신라의 제과사업부로 출발한 뒤 84년 별도 회사로 독립해 올해로 26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신라명과의 새로운 브랜드다. 서양 스타일의 빵보다는 국내산 호박.복분자.흙마늘 같은 '신토불이' 재료를 사용한 한국적 빵으로 승부를 걸고 있다. 2008년 10월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 1호점을 낸 이후 2년 만에 50여 곳으로 매장 수를 늘렸다. 집중적인 제품 연구개발과 세련된 매장 인테리어 등이 강남권을 중심으로 호평을 받은 덕분이다. 최근엔 '브레댄코는 싱싱한 자연을 담습니다'란 카피와 함께 천연효모로 빵을 만들었다고 강조하는 TV 광고를 내보내고 있다. 변화의 중심에는 홍수현(39) 브레댄코 이사가 있다. 홍평우 신라명과 회장의 3남매 중 맏딸로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10여 년 동안 신문기자로 일하다 2007년 신라명과에 합류했다. 이후 브레댄코의 브랜드 개발에 앞장서고 있다. 지난해 5월에는 신라명과에서 법인을 분리했다. 홍 이사는 "신라명과는 90년대 중반까지 고급 브랜드로 인지도가 높았으나 외환위기 직후 긴축경영으로 성장의 기회를 놓치고 정체됐다"며 "브레댄코는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는 젊은 회사로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 "천연효모 빵 맛 깊고 소화도 잘 돼" -브레댄코는 천연효모로 빵을 만들었다고 광고한다. 천연효모와 이스트는 어떻게 다른가. "드라마에선 이스트가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어린 탁구의 천부적인 소질을 발견하는 계기이기도 하고 청년으로 성장한 탁구와 마준이 이스트 없이 빵을 만드는 대결을 펼치기도 한다. 이스트는 빵의 숙성과 발효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재료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막걸리 주종으로 빵을 만들었듯이 이스트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제조 과정이 까다로워서 그렇지 천연효모라는 더 좋은 재료가 있다. 과일을 잘 익게 해주는 야생 효모를 숙성시켜 빵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천연효모는 이스트에 비해 어떤 점이 좋은가. "빵은 누룽지처럼 구수한 맛이 나는 게 좋다. 그런데 싸구려 빵은 겉모습은 괜찮은데 먹어보면 느글거리는 맛이 난다. 재료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천연효모를 쓰면 빵의 풍미가 깊어지고 향이 좋아진다. 빵의 결도 촉촉해져 부드러움이 오래간다. 간혹 빵을 먹으면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는 사람이 있다. 이스트가 체질에 맞지 않아서다. 이런 사람이 천연효모 빵을 먹으면 소화가 한결 쉬워진다. 천연효모 빵은 아토피가 있는 어린이들이 먹기에도 좋다." -그렇게 좋은 재료라면 다른 제빵업체는 왜 천연효모를 쓰지 않나. "제품 개발과 대량 생산이 쉽지 않아서다. 천연효모의 배양은 된장을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다. 발효균을 배양해 반죽하는 데 15~20일 정도 걸린다. 그런데 체인점이 1000개 2000개나 되는 업체에선 오래 기다릴 여유가 없다. 게다가 빵을 대량 생산하는 공장에선 센 바람으로 반죽을 섞어주는 에어믹서를 쓴다. 그러면 반죽 과정에서 바람이 들어가 빵의 질감이 질겨진다. 브레댄코는 소량을 일일이 반죽해 뭉치는 옛날 방식대로 생산하고 있다. 빵 반죽에 탕종법을 쓰는 것도 내세울 만하다. 섭씨 100도의 끓는 물로 반죽한 다음 저온에서 장시간 숙성시키는 방법이다." -빵에 신토불이 제철 재료를 쓴다는 것은 낯설다. "어느 빵집에서나 흔히 보는 천편일률적인 빵보다는 최대한 새로운 재료를 시도해 보려고 한다. 일본에 가보면 '이런 빵도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희한한 빵이 많이 나온다. 일본식 된장을 넣은 미소빵 명태알을 이용한 명란젓빵 등이다. 사실 앙금빵(단팥빵)도 일본에서 유래한 것이다. 브레댄코에선 복분자.석류.연근.호박.유자.흙마늘 같은 다양한 재료를 빵에 시도했다. 취나물 포카치아(밀가루 반죽 위에 각종 재료를 얹어 피자처럼 구운 이탈리아식 빵)나 우엉 바게트 등도 개발했다. 샌드위치에는 된장.간장 같은 재료를 소스에 배합했다. 음료에서도 복분자에이드 미숫가루셰이크처럼 한국적 재료를 접목한 제품을 내놓고 있다." "무리한 확장으로 1위 할 생각 없다" 홍 이사는 인터뷰 중 '앙팡'이란 빵을 내밀며 "간판 제품인데 한번 먹어보라"고 권했다. 둥그런 빵 속에 팥고물이 들어 있는 앙금빵인데 크기가 작아 귀여워 보였다. 한 입 베어 물어보니 숙성한 빵의 구수함과 팥고물의 달콤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작고 빨간 반원 모양의 '복분자 미니번'이란 빵도 별미였다. 홍 이사는 "'티니(Tini)'라는 명칭으로 10여 종의 작은 빵 시리즈를 내놨다. 밀가루 반죽과 고물의 최적 비율을 찾느라 제품 개발에만 6개월 이상이 걸렸다"고 소개했다. -아이디어가 좋아도 제품 개발로 연결하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신라명과는 이미 90년대 중반에 국내 최초로 저온 숙성빵 전용라인을 설치했던 우수한 기술력을 갖고 있다. 당시 기술개발의 주역이 임헌양 기술고문인데 현재 71세의 고령에도 현장을 떠나지 않고 있다. 드라마에서 탁구의 스승으로 나오는 팔봉 선생(장항선 분)처럼 명장 타이틀을 갖고 있다. 수많은 제과.제빵업체 가운데 명장이 있는 곳은 우리가 유일하다. 임 고문은 지금도 신제품개발위원회를 주관하고 수시로 매장을 돌아다니며 기술지도를 하고 있다." -신라명과와 브레댄코의 관계는 어떻게 되나. "신라명과는 제품 개발과 생산 브레댄코는 시장 변화에 대응한 영업과 마케팅을 맡는 '투 트랙 전략'이다. 제품도 신라명과는 대량 생산하는 양산빵 브레댄코는 즉석에서 구워서 판매하는 즉석빵으로 구분했다. 기존의 신라명과 가맹점은 그대로 유지하지만 신규점은 브레댄코로 집중한다. 신라명과는 이미 가맹점보다 단체 납품 같은 특판사업에서 훨씬 많은 매출을 올리고 있다." -제빵업계의 후발 브랜드로서 선발 주자를 따라잡을 계획이나 목표가 있다면. "신라명과의 확고한 철학은 '먹는 장사에서 큰돈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돈에 욕심을 부리면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팔봉 선생의 후배였던 박춘배(최일화 분)가 실패한 이유다. 브레댄코도 무리한 확장으로 덩치를 키워 업계 1위를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대신 맛있고 질 좋고 다양한 빵으로 많은 고객의 선택을 받길 원한다. 한 달에 몇 개씩 가맹점을 늘리겠다는 목표도 없다. 그럼에도 빵 맛이 좋다고 찾아오는 창업 희망자들이 많다." 주정완 기자

2010-09-09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여성 임원의 리더십] '김치명인' 유정임 풍미식품 대표

21년전 재래시장서 가게 창업…2005년 3층 공장 건물로 확장 칼슘 강화 김치 등 13가지 특허…김치 세계화로 동탑산업훈장 김치 전문 업체 풍미식품의 유정임(55) 대표에게 올해는 큰 경사가 겹쳤다. 지난달 7일 제14회 여성 경제인의 날 기념식에서 유 대표는 동탑산업훈장을 목에 걸었다. 독창적 시도로 전통식품인 김치를 발전시키고 외국인들에게 김치의 우수성을 알려 한식의 세계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올 초에는 농림수산식품부에서 포기김치 분야의 식품명인으로도 지정됐다. 김치를 담글 줄 아는 사람은 무수히 많아도 김치명인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현재까지 유 대표를 포함해 단 두명 뿐이다. 경기도 수원시 오목천동 풍미식품 본사에서 만난 유 대표는 "24년 전 재래시장에서 작은 김치가게로 시작해 여기까지 왔다. '유정임 미쳤어'란 말도 많이 들었지만 배추는 딸 무는 아들로 여기고 애정을 쏟아부었다"고 말했다. 그는 "김치는 한국의 자존심이고 밥상은 약상이라는 생각으로 항상 최상의 재료만 쓰려고 했다. 이제 훈장까지 받았으니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여성 최고경영자(CEO)가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 -김치가 다르면 얼마나 다르기에 식품명인으로 지정되고 훈장까지 받았나 궁금하다. "김치는 자식이자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애정과 정성을 다했다. 주판알을 튕기지 않고 정직하게 재료와 손맛으로 승부했다. 한참 어려울 때에도 먹는 것으로 장난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켰다. 가족에게 내놓을 정도가 아니면 팔지 않았다. 예를 들어 고추는 반드시 태양초 소금은 볶은 천일염을 썼다. 신선한 배추와 무를 꼼꼼하게 고르는 것은 기본이다. 당연히 김치에 들어가는 모든 재료는 국내산이다. 아무리 중국산이 많이 들어와도 좋은 재료로 김치를 담그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본다." -김치 담그는 법은 어디서 배웠나. 무슨 비법이라도 있나. "친정어머니가 음식 솜씨가 좋았다. 덕분에 나도 손맛을 타고난 것 같다. 주변에 잔칫집이 있으면 김치 등 음식 준비를 도와줬는데 '맛있다'는 칭찬이 자자했다. '돈을 낼 테니 김치 좀 사 갈 수 없느냐'는 말도 자주 들었다. 그러다 아시안게임이 열리던 1986년에 문닫은 김치가게를 인수해 사업을 시작했다. 새로운 김치를 개발하기 위한 연구도 열심히 했다. 부설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김치와 장류로만 13가지 특허를 취득했다." -김치는 전통식품인데 특허의 대상이 될 수가 있나. 어떤 특허가 있나.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다. 전통식품이라고 무조건 예전 방식을 고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 우리 할머니들은 김장을 담그면 계란껍질을 김치에 얹기도 했다. 계란껍질에는 칼슘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착안한 것이 칼슘 강화 김치다. 조리법을 체계화해 특허를 받았다. 호남 지방에서 김치에 고기를 섞는 것에 힌트를 얻어 사골김치도 개발했다. 쇠고기.돼지고기.닭고기.오리고기를 끓는 물에 익힌 뒤 숙성시켜 김치 양념에 버무린 것이다. 매운 맛에 익숙지 않은 외국인을 위한 파프리카 김치와 딸기 고추장도 특허를 받았다. 맵지 않으면서 단맛이 나니까 아이들도 좋아한다." -훈장을 받을 때 공적사항엔 '한식 세계화에 기여'도 있었다. "김치공장과 함께 김치박물관과 체험관을 운영한다. 단순히 김치만 만들어 팔 게 아니라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관광객.체험객이 해마다 1만 명 정도 찾아온다. 외국인들도 많이 와서 공장을 견학하고 김치 담그는 법을 배워간다. '맛있다' '재미있다'며 반응이 매우 좋다. 경기도에서 공식 관광 코스로 지정했다. 일본.호주 등에 김치 수출도 한다. 앞으로 외국인의 밥상에도 하루 세 끼 김치를 올리면 좋겠다." 86년 수원시 권선구 세류시장의 50㎡짜리 가게에서 창업한 유 대표는 2005년 오목천동의 6600㎡ 부지에 지하 2층 지상 3층짜리 공장과 직원 기숙사 등을 짓고 이전했다. 현재 고정 거래처는 신세계백화점을 비롯한 1000여 곳 직원은 60여 명에 달한다. 인터넷 홈페이지(www.kimchicenter.com)에서 온라인 판매도 한다. 올해 매출은 70억원 정도를 내다본다고 한다. -평범한 주부에서 창업을 결심한 동기는 뭐였나. "일을 해야지 놀지는 못하는 성격이다. 창업 전에도 우유배달 같은 부업을 했다. 김치가게를 하면서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아이들 도시락을 싸준 다음 바로 시장에 나와 김치를 담갔다. 아이스박스에 김치를 싸 들고 아무 기업체고 무작정 찾아다녔다. 고정 거래처가 하나 둘 늘어날 때마다 사업하는 짜릿함에 빠져들었다." -24년 동안 사업을 했으면 힘든 일도 많았을 텐데.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수시로 발생하는 배추 파동이 제일 힘들었다. 초기엔 자금이 부족해 많은 물량을 미리 확보해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멀리 부산 근처까지 가서 배추밭을 계약했는데 작황이 좋지 않아 통째로 갈아엎기도 했다.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이겨내야 한다고 하면 어디선가 힘이 나왔다. 또순이란 말도 많이 들었다. 여자는 약해도 여성 기업인은 강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최근엔 상생 경영이 화두다. 현장에서 느끼는 점이 있다면. "중소기업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기술개발이다. 그런데 식품 분야는 연구개발로 지원을 받기가 쉽지 않다. 여기저기서 중소기업 지원을 확대한다고 하지만 막상 가보면 담보를 요구하기도 한다. 2005년 공장을 확장.이전하고 최첨단 위생시설을 갖췄는데 미래를 위한 투자로 봐주지 않고 부채비율이 높다고 따진다. 한마디 더 하자면 공공근로는 없어져야 한다고 본다. 중소기업은 가뜩이나 일손을 구하기 어려운데 공공근로가 인력난을 부채질하는 게 현실이다." -풍미식품은 인력 관리를 어떻게 하고 있나. "다른 중소기업처럼 우리도 외국인 근로자를 일부 쓴다. 외국인이 없으면 일을 못한다. 월급은 한국 직원과 차별 없이 똑같이 준다. 예전에 한국 사람들도 외국에 근로자로 갔다가 설움을 많이 당하지 않았나. 한국 직원들은 배송 담당을 제외하면 대부분 여성이다. 업종이 식품이고 CEO가 여성이니까 아무래도 여성 직원이 많다. 지금까지 한번도 직원들에게 '그만두라'는 말을 꺼낸 적이 없다. 우리 회사는 정년도 없다. 본인만 원하면 나이에 상관없이 일할 수 있다. 대신 내 일처럼 주인의식을 갖고 일해달라고 주문한다. 얼마 전에는 80세까지 일하다 나가신 분도 있고 지금도 60대 중반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앞으로 계획이나 포부가 있다면. "한 세대만 더 지나면 집에서 김치를 담그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면 김치를 사먹을 수밖에 없다. 직접 김치를 담그지는 않더라도 알고는 먹어야 한다. 어린 세대가 많이 우리 회사에 와서 김치를 배워가면 좋겠다. 우리만의 노하우나 비법이라고 감출 생각은 없다. 널리 알릴수록 발전이 있다는 생각이다. 최근에는 연근으로 담근 김치에 푹 빠져 있다. 연근은 아삭아삭한 식감이 뛰어날 뿐 아니라 불포화 지방산을 녹여주는 작용도 하기 때문에 건강에도 좋다. 예전엔 절에서 담가 먹던 것인데 제품으로 개발했더니 반응이 무척 좋다." 주정완 기자

2010-09-02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여성 임원의 리더십] 김수영 ADT캡스 마케팅 본부장

가족과 떨어져 7년간 해외 생활 "보안 서비스가 필요한 이는 여성" 실내 감시용 CCTV '블랙박스' 자녀 걱정 워킹맘용으로 바꿔 히트 '그들만의 리그'로 여겨지는 보안회사 여성 임원이라 눈길이 갔다. '마초' 조직에서 여성 리더십을 어떻게 발휘할까 궁금했다. 그런데 난감했다. 그녀 1975년생이다. 한국 나이로 36살. 리더십을 말하기에는 이른 듯 싶었다. 괜찮을까 걱정하는데 인터뷰를 위해 먼저 회의실에 들어와 있던 직원이 말했다. "젊긴 하신데 딱 보면 카리스마가 느껴질 거예요." 잠시 후 그녀가 방에 들어오자 그 직원이 말한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는 중저음의 목소리와 또렷한 눈빛이 사람을 잡아끌었다. 한국 양대 보안업체 중 하나인 ADT캡스의 김수영 마케팅 본부장이다. 김 본부장은 한양대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했다. 바로 교육대학원에 진학했고 한양여고에서 기간제 교사생활을 3개월간 했다. 그러다 갑자기 방향을 틀어 당시 대우캐리어(후에 LG캐리어에 인수합병)에 입사했다. 선생님의 길을 가려던 사람이 마케터로 변신한 것이다. -교육대학원을 그만두고 회사에 들어간 이유가 뭔가. "어렸을 때부터 난 '본투비(born to be 타고난)' 선생님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직장이란 어떤 곳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방학 동안 잠깐 경험해볼 요량으로 회사에 들어갔다. 기획팀 출근 첫날 밤 10시30분까지 일했다. '요것 봐라 내가 해 볼 만하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기 같은 거. 재밌었다. 나를 발전시켜 나가는 데는 교사보다 이게 더 맞겠다 싶었다." -교사와 마케터는 전혀 다른 일일 것 같다. "그렇지만 교사 경력이 도움이 된다. 선생님은 아이들 눈높이에서 설명해야 한다. 그런 능력은 마케터에게도 필요하다. 고객 입장에서 영업사원의 입장에서 임원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이에 맞춰 설명해야 한다. 마케팅의 기본은 이해다." 그의 경력을 보면 '해외통'이다. 해외에서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경영학석사(MBA) 출신도 아니면서 2001~2004년은 싱가포르에서 2004~2007년은 미국 본사에서 일했다. 해외 근무는 젊은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바다. -'국산'이 해외 근무를 하게 됐다. 비결은 뭔가. 가족이 있었다면 쉽게 나가지 못했을 텐데. "운이 좋았다. 그렇지만 준비되지 않았다면 기회를 못 잡았을 거다. 회사 인수합병(M&A) 과정에서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인정받았다. 결혼을 98년에 했다. 일찍 한 편이다. 남편이 많이 지원해주고 이해해 줬다. 싱가포르에서 근무할 때는 1년에 많아야 여섯 번을 봤다. 그나마 미국에 있을 때는 남편도 MBA를 와서 주말마다 가끔 볼 수 있었다." -2007년에 미 시러큐스대 MBA를 졸업한 걸로 돼 있다. 회사 다니면서 MBA를 했다는 얘긴가. "회사가 내 가능성을 보고 학비를 대 주고 일주일에 낮 업무시간 3시간씩을 빼주는 등 배려해 줬다." -미국 본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얘긴데 왜 한국으로 돌아왔나. "남편과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이도 가질 때가 됐고. 정착해야 하는데 미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한계가 보였다. 한국에서 내가 할 수 있고 기여할 수 있는 일이 더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가 언제 태어났느냐고 물었더니 김 본부장 "언제였더라…" 이러면서 수첩을 편다. "2008년이네요. 제가 이런 데 약해서. 그래도 회사 매출액은 잘 기억해요." 옆에 앉아 있던 송지현 팀장은 "김 본부장이 출산 후 열흘 만에 미국 출장길에 올랐던 일화는 팀 직원들 사이에선 전설처럼 전해온다"고 말했다. -몸조리도 안 하고 열흘 만에 미국 출장이라니. "내가 빠질 수 없는 출장이었다. 애를 낳았다고 나 몰라라 누구에게 떠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좀 심하다. 예정된 출장이었다면 미리 양해를 구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출산 일정을 조정하려고 했다(웃음). 예정일을 계산해 보니 출산 열흘 뒤가 출장이더라. 예정일을 2주 앞두고 유도분만을 했다. 그럼 한 달 가까이 쉴 수 있는 거니까. 그런데 애가 안 나왔다. 일주일 앞두고 다시 유도분만을 해 봤다. 역시나 안 나왔다. 결국 아이는 예정일에 나왔고 지금은 건강하게 잘 커서 고맙다. 내가 원래 체력이 좀 된다." 출산을 계기로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 다른 일에 도전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는 10여년간 몸담았던 회사를 나와 잠시 웨딩사업 관련 벤처회사에서 일한 뒤 2년 전쯤 지금의 직장인 ADT캡스에 들어왔다. -보안회사와 여성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다. "뒤집어서 생각해 보자. 보안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남자다. 하지만 보안 서비스가 필요한 사람은 누구냐. 여자다. 소비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게 마케팅의 출발이다. 여자들이 뭘 원하는지 알아야 우리 서비스를 팔 수 있다. 그런 면에선 보안회사 마케팅 담당자는 여자가 더 어울린다. 내가 입사 후 중점을 둔 게 '워먼즈 세이프티(Womne's Safty)'다. 예를 들어 무인감시 시스템으로 '블랙박스'라는 서비스가 있었다. 장비를 설치하면 외부에서 웹이나 휴대전화로 CCTV 화면을 볼 수 있다. 주로 소규모 자영업자 사장님들이 가게 관리를 위해 썼다. 그런데 내가 보니까 이게 일하는 엄마들에게 딱이더라. 나부터 블랙박스를 집에 설치해 애가 잘 놀고 있는지 보고 있다. 이번 달 블랙박스와 비상벨 그리고 화면을 볼 수 있는 전용 미니 모니터를 갖춘 '워킹맘 패키지'를 내놓는다. 블랙박스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매출이 40% 늘었다." -그래도 남자 직원이 대다수고 젊은 편이어서 조직 관리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 "회사 밖에서는 상사라고 위엄 떨지 않는다. 내가 먼저 숟가락 놓고 물 따른다. 직원들에게 장난도 많이 치고. ADT캡스 마케팅 본부장이라는 자리가 700명의 영업사원을 꼼짝 못하게 옥죌 수 있다. 그러나 그러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들 이름을 모두 외우고 따로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적극적으로 먼저 다가선다. 노래도 잘 부른다. 요즘 자주 부르는 노래는 빅뱅의 '붉은 노을'이다. 랩 부분까지 소화한다. (송 팀장은 "보통 여성 임원들은 분위기를 파악해 이에 맞춰 적절한 태도를 보여주는 경향이 있는데 김 본부장은 분위기를 주도한다"고 말했다.) -평범한 워킹맘이 보면 당신은 '수퍼우먼' 같다. "일과 가정의 균형을 맞춘다는 게 굉장히 어려운 문제다. 애랑 놀아주는 시간은 부족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열정적으로 사랑을 쏟아낸다. 나중에 아이도 크면 그런 엄마를 이해하고 엄마를 자랑스럽게 여길 거라 믿는다." -여자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여자라는 걸 장애로 여기지 말고 장점으로 생각했으면 한다. 여자가 주차를 못 하는 이유가 뭔지 아나. 남자는 자기 차를 집어넣는 게 우선이고 여자는 남의 차를 다치지 않게 하는 게 우선이라서다. 이런 상대에 대한 배려와 포용성은 여성의 장점이다. 이런 걸 개발하면 경쟁력이 된다. 그리고 애 낳으면서 느낀 거지만 여자가 애도 낳을 수 있는데 못할 게 없다. 당장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걸 즐기면서 극복했으면 한다." 고란 기자

2010-08-19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여성 임원의 리더십] 채은미 페덱스코리아 사장의 '스킨십 경영'

직원이 행복해야 이익도 난다…'사람에 대한 배려'가 최우선 28세 때 최연소 부장 승진…2006년 첫 한국인 CEO 발탁 3월 28일 오후 서울 김포공항 부근의 한 웨딩홀. '송공(頌功) 지승욱 감독님 정년 퇴임식'이란 현수막이 걸려 있는 무대를 향해 채은미(48) 페덱스코리아 사장이 발걸음을 옮겼다.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제가 대리 시절 오렌지색 서류봉투를 배달하러 본사에 오시던 감독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일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답사를 하는 지씨의 목소리가 떨렸다. "회사가 저의 가치를 알아준 덕분에 37년 근무하는 내내 행복했습니다." 이날 행사는 1973년 입사해 만 60세 정년을 채우고 퇴직하는 지씨를 환송하는 자리였다. 항공기에 화물을 싣고 내리는 업무(화물적재직)을 맡았던 지씨는 현장에서 평직원으로 37년을 근무했다. '사오정(45세가 정년)' '오륙도(56세까지 직장을 다니면 도둑)' 따위의 유행어는 이 회사에선 전혀 통하지 않는다. 채 사장은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정년 퇴임식엔 꼭 참석한다. "경영의 넘버원은 사람이고 사람 관계는 처음과 끝이 중요하다"는 확고한 철학이 있어서다. 2006년 페덱스코리아의 첫 한국인 최고경영자(CEO)로 발탁된 채 사장은 직원과 소통을 중시하는 '스킨십 경영'으로 업계에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680명 직원의 이름과 얼굴을 모두 기억한다. 웬만한 직원은 언제 입사했고 무슨 부서에서 근무했는지까지 파악하고 있다. 사무실 복도나 현장 사무소에서 직원을 만나면 반드시 이름을 부르며 정겹게 말을 건다. 나이가 한참 어린 직원이라도 꼭 '님'자를 붙여 존대한다. 그래서 직원들은 채 사장과 계속 같이 일하고 싶어 한다. 지난해 이 회사의 이직률은 2.94%로 한국 기업 평균(300인 이상 기업 기준 13.4% 잡코리아 조사)에 비해 훨씬 낮았다. 채 사장은 "직원은 기업의 가장 가까운 이해관계자면서 기업이 생존할 수 있는 원초적 힘을 가진 존재"라며 "의외로 직원을 소홀히 대하는 기업이 많은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직원이 행복해야 좋은 서비스가 나오고 고객 만족으로 이어져 결국 회사의 이익으로 돌아온다"며 "페덱스의 경영철학은 '사람(People)-서비스(Service)-이익(Profit)'이고 최우선 가치는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페덱스는 670대의 항공기를 보유한 세계 최대의 항공 특송회사고 페덱스코리아는 한국 현지 법인이다.) -전직원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한다니 대단하다. "내가 그런 데 소질이 있다.(웃음) 예컨대 현장사무소를 가기 전엔 회사 전산망에서 담당 직원들의 사진과 프로필을 쭉 훑어본다. 그냥 갈 수도 있지만 조그만 성의라고 생각한다. 직원들을 만나면 애는 학교에 잘 다니느냐 경조사는 잘 치렀느냐 등등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건네며 관심을 보이려 한다. 그런 것이 반복되면 저절로 머릿속에 들어온다." -현장에는 자주 가는 편인가. "자주 가야 한다. 항공화물 배송이란 게 첨단 기술산업은 아니다. 전국에 14개 사무소가 있는데 대부분 직원이 화물을 나르는 배송직이다. 이들이 힘들어 할 때 어깨를 두드려 주며 격려하고 회사에 대한 의견이 있으면 최대한 귀 기울여 들어주려 한다." -이직률이 매우 낮은데 비결이 뭔가. "사실 급여가 아주 높은 수준은 아니다. 직원들이 존중 받는다는 자부심과 주인의식을 갖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우리는 '방문 열어놓기 정책(Open Door Policy)'이란 특이한 제도가 있다. 누구라도 자유롭게 경영진이나 상사를 찾아가 상담하거나 업무 관련 의견을 말할 수 있다. '내부자 우선 지원 프로그램'도 만족도가 높다. 승진 기회나 빈자리가 생기면 내부 직원을 대상으로 공모한다. 능력만 있으면 연공서열이나 성별.직종을 따지지 않고 승진시킨다." -'직원 존중'의 철학과 리더십은 어디서 배웠나. "페덱스에서 일하는 20년 동안 외국인 상사를 여러 번 모시며 다양한 리더십에 대해 배웠다. 공통적으로 아랫사람을 잘 챙기는 기업문화에 큰 감명을 받았다. 예컨대 페덱스에는 비행기를 새로 사면 직원 자녀의 이름을 붙이는 전통이 있다. 전 세계 670대 비행기 중 내 아들의 이름을 딴 '양재'호도 있다. 그것만으로도 기쁜 일이지만 당시 홍콩에 있던 상사의 마음 씀씀이가 잊혀지지 않는다. 미국에 있는 비행기 사진을 어렵게 찍어 예쁜 액자를 만든 다음 일부러 한국까지 들러 전해줬다." 이화여대 불어교육학과를 나온 채 사장은 원래 파리 유학을 거쳐 대학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졸업 무렵 집안 형편상 꿈을 접어야만 했다. 플라잉타이거란 외국계 항공사에서 일하던 중 이 회사가 페덱스와 합병하자 자동적으로 페덱스 직원이 됐다. 그는 페덱스의 '내부자 우선 지원 프로그램'을 최대한 활용했다. 28세에 부장으로 승진하면서 국내 취항 항공사 최연소 부장이란 기록을 세웠다. 이후 북태평양 지역 인사 담당 상무와 한국 법인 사장까지 '한국인 최초'란 화제를 몰고 다녔다. 눈물 나는 노력과 도전이 숨어 있었다. 매일 영어학원 새벽반을 다니면서도 출근은 남보다 1시간 정도 빨랐고 업무시작 전까지 조간신문을 꼼꼼히 읽으며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웠다. 그러기 위해선 오전 5시쯤엔 어김없이 일어나야만 했다. -외국계 기업이 연공서열을 덜 따진다고는 해도 20대 부장은 지금도 흔치 않다.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해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미국인 지사장이 눈여겨봤던 모양이다. 지나가는 말처럼 '너도 부장 공모에 지원할거니' 하고 물어보더라. 그 말을 듣고 '나도 할 수 있구나'란 자신감을 얻었다. 당시 페덱스에서도 20대 여성의 부장 지원은 파격적이었다. 인터뷰를 두 시간이나 했는데 까다로운 질문이 많아 진땀을 흘렸다. 하지만 모르는 것을 억지로 답하지 않고 '나중에 회사 매뉴얼을 참조해 해결하겠다'고 솔직하게 임한 것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해외 유학 경험이 없는 순수 국내파인데도 외국계 기업 CEO가 됐다. "내가 흔히 말하는 '아침형 인간'이다. 모든 중요한 일은 오전에 끝낸다는 것이 철칙이다. 영어학원 새벽반도 10년 넘게 다녔다. 경영진이 되고 나선 비즈니스 마인드를 갖기 위해 MBA도 했다. 지금은 대학생인 아들이 한창 공부할 때는 바쁜 엄마 때문에 힘들어 할 때도 많았다. 퇴근하면 단 5분이라도 꼭 아들과 대화했다. '엄마는 바쁘지만 중요한 일을 한다'는 자부심을 심어줬다." -임원이나 리더를 꿈꾸는 여성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요즘 청소년들을 보면 똑똑한 여학생 인재가 많다. 하지만 사회에선 아직까지 여성이 소수인 것이 현실이다. 중요한 것은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긍정적 시각과 부지런함.열정의 세 가지 덕목을 강조하고 싶다. 이 세 가지는 남성도 할 수 있지만 여성에겐 한 가지가 더 있다. 열정을 뜻하는 영어 단어가 passion인데 여기에 com을 붙이면 배려를 뜻하는 compassion이 된다. 배려의 리더십은 여성이 남성보다 앞설 수 있는 덕목이다." WHO? 1962년 서울 출생. 정신여고와 이화여대 불어교육학과를 졸업했다. 85년 대한항공에 입사했으나 잦은 교대 근무로 자기계발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1년 만에 외국계 화물 전문 항공사인 플라잉타이거로 옮겼다. 91년 페덱스코리아에서 최연소 부장으로 승진했다. 회사를 다니며 이화여대 교육대학원 석사 학위와 국내에 개설된 헬싱키경제경영대학원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았다. 2000년 페덱스코리아 지상운영부 이사로 승진했고, 2004년 북태평양 지역 인사 담당 상무를 거쳐 2006년 첫 한국인 사장으로 발탁됐다. 주정완 기자 jwjoo@joongang.co.kr

2010-08-12

[여성 임원의 리더십] 임원진 8명 중 5명이 여성인 한국릴리

미국계 제약회사 한국릴리의 김선정(42) 상무는 오전 7시30분쯤 집에서 컴퓨터를 켜는 것으로 업무를 시작한다. 미국 변호사 출신으로 지난해 11월부터 재택근무를 하는 김 상무에겐 집이 사무실이나 마찬가지다. 회사의 지원을 받아 초고속 인터넷이 연결된 컴퓨터와 전화.팩스.프린터 같은 사무기기를 모두 갖췄다. 김민영 부사장 "회의와 겹칠 딴 졸업식, 상사가 등 떠밀어 참석" 김은자 부사장 "최근 5년 여성 리더 급증…일본선 '롤모델'로 삼아" 김선정 상무 "일·가정 병행 재택근무, 집중력 극대화해 만족" 이수진 상무 "'삶의 질' 단어 익숙한 일하는 여성의 천국" 최재연 상무 "'여자라서 안 된다' 없고 '여자니까 봐준다'도 없다" 초등학교 5학년짜리 딸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오후 4시까지 집엔 혼자 있다. 자유 복장이어서 가끔 파자마(잠옷) 차림으로 일할 때도 있다. 회사에 따로 방이 있지만 특별한 일이 아니면 출근하지 않는다. 그 방은 김 상무보다 다른 부서 직원들이 회의실로 쓰는 시간이 훨씬 더 길다. 김 상무는 "법무담당이란 업무 특성상 주로 혼자 일하는데 사무실보다 집에서 훨씬 집중이 잘 된다"며 "재택근무로 일과 가정생활을 병행할 수 있고 출퇴근 교통혼잡에도 시달리지 않아 대만족"이라고 말했다. 같은 회사의 김은자(42) 부사장은 오전 10시 전엔 회사에서 얼굴을 보기 어렵다. 그는 매일 아침 고교생 자녀들에게 아침식사를 챙겨 주고 느긋하게 회사에 나온다. 탄력근무제를 선택한 김 부사장의 정식 출근시간은 오전 10시다. 릴리 직원들은 3개월마다 오전 7시부터 10시 사이에서 본인에게 맞는 출근시간을 정할 수 있다. 그는 "남들이 보면 부사장의 출근시간으론 너무 늦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며 "하지만 임원이 유연하게 모범을 보여야 직원들도 제대로 탄력근무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릴리는 일하는 여성들에게 '꿈의 직장'으로 손꼽힌다. 재택근무나 탄력근무 같은 여성친화적인 제도를 실시하기 때문 만은 아니다. 이 회사에선 의사결정의 A부터 Z까지 여성의 목소리가 중요하게 반영된다. 직원들에게 몸바쳐 일하지 말고 '일과 가정의 균형'을 생각하라고 권유한다. 직원들은 육아 때문에 일을 포기할 이유도 일 때문에 가정을 방기할 필요도 없다. '여성 직원의 발전이 곧 회사의 발전'이란 이 회사의 모토는 결코 빈말이 아니다. 임원 구성에서도 확실히 드러난다. 전체 임원 8명 중 여성이 5명으로 과반수를 차지한다. 외국인 사장.부사장을 제외하고 한국인만 따지면 남녀 임원 비율은 1대 5까지 벌어진다. 릴리의 여성 임원 5인방을 만났다. 김민영(마케팅).김은자(대외협력) 부사장과 김선정(법무).이수진(재무회계).최재연(인사) 상무다. 이들은 근속 연수가 길게는 8년 짧게는 1년에 불과하다. 5명 모두 공채 출신의 '순혈'이 아닌 외부 영입파란 얘기다. 출신 학교가 모두 제각각인 이들에겐 학맥에 의한 줄서기나 편가르기도 없다. 김은자 부사장은 "2005년 이전만 해도 여성 임원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임원 구성에서 여성이 다수가 된 것은 최근 5년 사이에 일어난 큰 변화"라고 말했다. 그는 "출장 때문에 일본릴리에 가 보면 그곳 여직원들이 우리를 부러워하며 롤모델로 삼고 싶어 한다. 일본릴리는 한국보다 문화가 보수적이어서 그런지 아직도 여성 임원을 배출하지 못했다"고 소개했다. -많은 기업이 '남녀 평등'이나 '일과 가정의 균형'을 얘기하지만 말 따로 행동 따로인 경우가 많다. 김민영(43) 부사장 "재작년 미국 본사에서 상당히 높은 상사가 한국에 왔다. 회의시간이 공교롭게도 딸의 중학교 졸업식과 겹쳤다. 딸에겐 미안했지만 '못 간다'고 말해 뒀다. 그런데 상사가 어떻게 알았는지 '중학교 졸업식은 평생 한 번 뿐이다. 빨리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이 정도로 개인 생활을 존중해 주는구나 싶어 감격스러웠다." 이수진(39) 상무 "사실 릴리가 세 번째 직장이다. 첫 번째 직장인 회계법인에선 회사생활이 무엇인지 배웠고 두 번째 직장인 자동차 부품회사에선 기업이 돌아가는 방식을 배웠다. 그런데 릴리로 와 보니 QOL을 강조하기에 처음엔 깜짝 놀랐다. 삶의 질(Quality of Life)을 뜻하는 영어 약자인데 릴리 직원들에겐 매우 익숙한 단어다. 그만큼 '일과 가정의 균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얘기다." 최재연(37) 상무 "릴리는 성별과 직급을 초월한 수평적 관계를 기업의 핵심 가치로 강조한다. 사장부터 평사원까지 직함을 붙이지 않고 '○○님'으로 부른다." -여성 임원이 다수인 경우는 외국계 기업에서도 흔치 않다. 남성들이 역차별을 당하는 것은 아닌가. 최 상무 "대학에 취업설명회를 나갈 때마다 '여성이 일하기 좋은 직장을 만든 비결이 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러면 '내가 여성이란 사실을 느끼지 않게 하는 회사가 좋은 회사'라고 답한다. 릴리는 남자냐 여자냐보다 얼마나 능력이 있고 좋은 실적을 올렸느냐를 중요하게 본다. 성별과 관계없이 공평한 기회를 준다는 얘기다. 다른 기업에선 여자라서 차별도 있겠지만 힘든 일을 시키지 않고 봐주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릴리에선 '여자라서 못한다'는 말이 절대 나올 수 없다." -릴리의 다른 나라 법인에서도 한국처럼 여성 임원의 비중이 높은가. 김은자 부사장 "한국 같은 경우는 흔치 않다. 예컨대 아랍권에선 문화적 차이 때문에 여성 직원의 채용조차 쉽지 않다. 그래서 아시아여성네트워크(AWN)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내가 회장이고 나라별로 집행위원이 있다. AWN의 핵심 정책은 임원을 포함해 빈자리가 생기면 여러 후보 중 적어도 한 명은 여성이 포함되도록 하는 것이다. 여성이 후보에 올랐다는 것이지 채용이나 승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성에게도 최소한의 기회를 줘야 한다는 취지에서 만든 제도다." -임원도 재택근무를 하는 것이 특이하다. 재택근무의 좋은 점은 뭔가. 김 상무 "지난해 2월 릴리에 입사했는데 그해 11월부터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특히 외국과 업무 연락이 많은 경우엔 재택근무가 매우 편하다. 나는 업무상 직속 상사가 오스트리아 빈에 그 위의 상사가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에 있다. 그래서 밤늦게까지 집에서 국제전화로 회의할 때가 많다. 재택근무는 결코 일을 적게 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다. 오히려 출퇴근이 따로 없어 근무시간으로 따지면 더 길어지기 쉽다." 이 상무 "2년 전 재택근무를 해 봤다. 직장생활에서 최고의 황금기였다. 외국과 연락이 주업무였으니 한국 사무실엔 나올 필요가 거의 없었다." 최 상무 "회사에서 정기적으로 재택근무 희망자 신청을 받는다. 현재 10명 정도가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간혹 재택근무를 하다가 외로움을 느끼거나 자기 관리가 어렵다며 돌아오기도 한다. 인사부에선 업무의 효율성을 기준으로 재택근무를 허용한다. 기준이 육아가 아니라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엄마가 근무시간에 아기를 본다면 업무에 방해를 받기 때문이다." -탄력근무제는 얼마나 활성화돼 있나. 김민영 부사장 "한때 오전 7시에 출근해 오후 4시에 퇴근했다. '아침형 인간'이라 오전에 집중이 더 잘돼서다. 퇴근 후엔 학원을 다니며 자기 계발을 하거나 극장에서 영화를 볼 수도 있어 좋았다. 지금은 오전 9시30분에 출근해 오후 6시30분에 퇴근한다. 담당 업무가 마케팅인데 혼자선 할 수 없다. 팀원이 가장 많이 회사에 있는 시간에 맞춰 근무시간을 정했다." 이 상무 "탄력근무의 핵심은 유연성이다. 개인 사정과 업무 특성을 동시에 고려한다. 몇 시 출근 몇 시 퇴근이냐보다 자신이 가장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시간을 유연하게 결정한다." -유연성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것은 미국계 기업이라선가. 김은자 부사장 "릴리는 미국에서도 여성들이 선호하는 회사로 정평 나 있다. 미국에선 '워킹 마더'라는 잡지가 매년 '일하는 엄마를 위한 가장 좋은 기업'을 꼽는데 항상 10위 안에 들어간다. 포춘이 선정하는 '가장 일하고 싶은 100대 기업'에도 늘 포함된다." -출퇴근 외에 다른 부분에선 얼마나 유연하게 하고 있나. 최 상무 "9월 말 사무실을 옮길 때 획기적인 변화를 계획하고 있다. 여기 있는 임원들의 방도 책상도 다 없어진다. 회의가 있으면 회의실로 가고 따로 업무를 볼 공간이 필요하면 빈자리를 돌아가며 쓰면 된다. '모바일 오피스(이동식 사무실)'를 전면적으로 도입하는 것이다. 다만 업무 특성상 한자리에서 계속 근무하는 직원들에겐 책상을 주기로 했다. 그 결과 임원 책상은 빼고 비서 책상은 남기는 일이 벌어지게 됐다." 주정완 기자

2010-07-29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여성 임원의 리더십] 김정겸 탑드릴 사장, 드릴로 금녀의 땅을 뚫다

수출 비중 90%로 높여 도약…씨티-중기원 여성기업인상 수상 사람 못 찾아 비싼 기계 놀려…중소기업 설움 톡톡히 맛봐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변변한 직장도 없는 애 딸린 서른여덟살 여자가 살기에 한국은 팍팍했다.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에 늦깎이 대학생이 됐지만 거기까지였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6년을 버티다 97년 호주 이민을 결심했다. 남편이 물려준 유산으로 오피스텔이 있었다. 세입자는 드릴에 들어가는 해머(Hammer).비트(Bits)라는 부품을 호주에서 수입해 파는 사람이었다. 호주 사정이라도 들어볼까 해서 만난 자리에 그가 친구라며 한 남자를 데리고 나왔다. 그 남자 유난히 눈이 맑았다. 엔지니어 출신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해머.비트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 해 전에 5년간 운영하던 회사가 부도를 냈다고 했다. 제품과 기술에는 문제가 없었다. 흑자 부도였다. 동업자였던 그 남자의 친구가 회사를 방만하게 운영하다 벌어진 일이었다. 가족조차 빚더미에 신음하던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 남자의 열성적 태도가 묘하게 마음을 움직였다. 해머.비트라는 이름조차 처음 들어본 그녀였다. 그렇지만 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길이 보이는 듯 싶었다. 그녀는 3회 '씨티-중소기업연구원(KOSBI) 여성기업인상 기업가정신상'을 수상한 김정겸(51) 탑드릴 사장이다. 그 남자는 지금 그녀의 남편이다. "제조업의 핵심은 제품과 기술력이죠. 그런데 기술이 있다고 경영도 잘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기술과 경영은 구분해서 생각해야죠. 왜 가끔 있잖아요. 기술이 있고 제품 아이디어가 있다고 해도 재무.영업 등 관리를 잘못해 실패하는 엔지니어 출신 경영자들요." 김 사장이 한국에서 찾은 희망은 지금 남편이 가진 기술력이었다. 해머.비트는 건설 기초공사에 필요한 천공 곧 땅에 구멍을 뚫는 드릴에 들어가는 장비다. 당시 해머.비트는 해외산이 대부분이었다. 그 일부라도 한국산으로 돌릴 수 있다면 승산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김 사장은 사업성이 보인다고 덥석 물지는 않았다. 97~98년은 외환위기로 건설경기가 바닥을 치던 시절이다. 자금도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한번 망하면 다시 일어나기 힘들다. 신중할 수 밖에 없다. 대신 남편의 전 거래처를 관리하며 때를 기다렸다. 마침 99년 건설경기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해 9월 돈을 끌어모아 경기도 시화공단에 660㎡(약 200평) 공장을 계약하고 컨테이너 박스를 사무실로 꾸몄다. 중고기계 3대를 그것도 할부로 샀다. 창립 멤버도 단출했다. 김 사장과 남편 기술자 3명이 전부였다. 시작은 순탄했다. 성능은 비슷한데 해외에서 1000만원 주고 사오던 걸 탑드릴은 500만원에 팔았다. 주문이 밀렸다. "다행히 시장 진입에는 성공했죠.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내가 가만히 있는데 남들이 다 앞으로 가면 내가 뒤처지는 거잖아요. 회사가 크려면 뭔가가 필요한데 잘 잡히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한번은 공사 현장에 갔는데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눈살 찌푸리는 게 보이더라고요. 그리고 얼마 후엔 공사 현장의 진동이나 소음에 관한 민원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는 기사가 나오고요. 요즘 어디 외딴 데다 집 짓나요? 다 시내에 짓지. 이거다 싶었죠." 2002년부터 소음.진동을 줄인 제품 개발에 착수했다. 이듬해 시제품이 나왔는데 대박이었다. 일부 자치단체에서는 민원 발생을 우려해 천공 작업 때 탑드릴 제품이 아니면 허가도 안 내줄 정도였다. 2003년부터 매출이 급격히 늘었다. 밀려드는 주문은 반가운데 비좁은 공장이 문제였다. 컨테이너 사무실은 초라했다. 주문량을 소화하려고 사람 더 뽑자 해도 공장에 와 보고는 뒤도 안 보고 도망을 쳤다. 번듯한 공장이 필요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변변한 담보도 없는 설립된 지 5년도 채 안 된 회사에 은행 문턱은 높았다. 사장이 여자라는 것도 마이너스 요인이었다. 당시만 해도 외환위기 때 망한 기업의 경영자들이 아는 여자를 '바지 사장'으로 내세워 회사를 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은행이 김 사장을 바라보는 시선도 딱 그만큼이었다. "뒤에 자꾸 누가 있는 거 아니냐고 그러는 거예요. 억울했죠. 내가 키운 회사인데. 그런데 생각해보니 은행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요. 돈 떼이면 다 자기들 책임이니. 그래서 대출 안 해줘도 좋으니까 한 번만 회사로 와달라고 사정했죠. 공장 돌아가는 걸 보면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어요." 그리고 은행은 지점의 최대 한도만큼 김 사장에게 대출을 해 줬다. 660㎡에서 시작한 공장은 2004년 3300㎡(약 1000평)으로 늘어났다. 본격적으로 매출을 늘려보려는데 탑드릴 제품을 베낀 경쟁업체들이 싼값을 무기로 시장을 파고들었다. 시장 점유율도 줄고 무엇보다 마진이 줄었다. 한국에서는 답이 없었다. 김 사장은 길은 해외에 있다고 판단했다.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해외 진출을 추진했다. 팸플릿 한 장 들고 중장비 기계 부품 전시회를 찾아갔다. 처음엔 출장비만 날리고 오는 꼴이었지만 차츰 매출로 이어졌다. 미국.중국.러시아.남아공 등 전 세계 40여 개국에 수출한다. 전체 매출액의 90% 정도가 해외에서 나온다. 해외 판로 개척으로 2005년 32억원이던 매출액은 2008년 63억원으로 두 배 가까이로 늘었다. 지금도 전시회에는 매년 3회 이상 참가한다. 그러나 탑드릴도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부동산 경기 침체에서 비켜가기 힘들었다. 지난해 매출액은 58억원으로 2008년에 비해 줄었다. 그나마 경쟁 업체들이 벼랑 끝에 몰린 것에 비하면 선방한 것이다. 리스크 관리에 철저한 김 사장의 경영 스타일 덕이다. "여자가 어떻게 그것도 드릴 부품 만드는 거친 회사를 운영하느냐는 소릴 들어요. 여자가 추진력이 떨어질지 모르지만 꼼꼼하고 신중하니까 기업 운영하는 데는 더 맞을 수 있다고 봐요. 키코(KIKO.선물환 통화옵션) 때문에 여기 공단에 있는 회사들이 휘청거렸지만 우리 회사는 멀쩡했어요. 제가 단 한 푼도 키코 가입을 안 했거든요. 은행이 가지고 온 계약서를 보니까 환율이 오르면 돈을 엄청 잡아먹을 수도 있겠더라고요. 그땐 저보고 '바보'라고들 했지만 지금 보니까 제가 잘한 거죠." 또 회사 덩치를 키우려고 무리수를 쓰지도 않는다. 해머.비트는 건설 기초장비라 꼭 필요하지만 일단 기초공사가 끝나면 더 이상 필요가 없다. 그래서 건설업자가 자금 압박에 시달리면 차일피일 대금 지급을 미룬다. 김 사장은 그래서 확실히 돈 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니면 물건을 안 판다. 올 들어 대형 건설사마저 쓰러지는 상황에서도 탑드릴이 받은 어음 가운데 부도가 난 것은 총 1억2000만원에 그쳤다. 김 사장의 요즘 가장 큰 걱정은 사람이다. 지난해 투자한 기계 설비 3대 중 1~2대는 그걸 쓸 줄 아는 사람이 없어 놀리고 있다. "지난번에는 보링머신(이미 뚫려 있는 구멍을 둥글게 깎아 넓히는 작업을 주로 하는 공작 기계)이라는 비싼 기계를 들여 놓고도 사람을 못 찾아 7개월 동안 놀렸어요. 그리고 사람을 찾긴 했는데 그 직원도 얼마 안 가 그만둬서 결국 팔아버렸죠. 중소기업 하는 설움이죠." 김 사장은 그래도 꿈꾸는 걸 잊지 않는다. 꿈이 없는 기업에는 그리고 경영자에게는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꿈이 뭐냐고 물었다. "3만3000㎡(약 1만 평) 대지에 공장을 짓는 거예요. 여기에는 공장도 있고 호텔 뺨치는 기숙사 기술자를 양성할 수 있는 학습훈련장 직원들이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아트홀.축구장.의료시설 등이 들어가죠. 이 꿈 때문에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 수 있는 겁니다." 고란 기자

2010-07-22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여성 임원의 리더십] 김상경 한국국제금융연수원장

"행장 방에 들어가라." 지난해 말 한 은행의 여자 부장이 김상경(61.사진) 한국국제금융연수원장을 찾았다. 임원이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일만큼은 잘한다고 자부하지만 옆에서 도는 얘기를 듣자니 불안했다. '그 자리는 누가 유력하다더라' '누구는 누구 고등학교 후배라더라' '누구는 누구 라인이라 가망 없다' 등등. 은행 내 여자 임원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은 것도 마음에 걸렸다. 고민 끝에 '금융계의 대모'라는 김 원장을 찾았는데 그가 내놓은 해결책이라는 게 은행의 제일 어른인 행장을 만나라는 거였다. 괜히 '승진에 눈먼 여자'라고 찍혀 눈 밖에 날지도 모를 일이다. 주춤하는 눈치를 보이자 김 원장이 다그쳤다. "남자들이 행장 방을 얼마나 자주 드나드는지 아느냐. 그게 뭐 어떠냐. 나만 열심히 하면 인정해 주겠지 하고 기다리다간 평생 기회 못 잡는다. 울어야 떡 하나라도 더 챙길 수 있다. 행장에게 '내가 이 분야에서는 최고이니 나를 그 자리에 앉혀 달라'고 말해라." 그 부장은 3월 본부장으로 승진했다. 나중에 얘길 들어보니 행장까지는 아니고 전무를 찾아갔다고 한다. 입사 20년 만에 처음으로 그래 봤단다. 김 원장은 한국 1호 외환 딜러다. 남녀를 통틀어 처음이다. 1979년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아멕스) 한국지점에서 비서로 일할 때 상사가 외환시장에 관한 영문 서적을 건넨 게 시작이었다. 1년간 아멕스의 홍콩.싱가포르.뉴욕 딜링룸을 돌며 외환 거래를 배웠고 80년 한국 최초로 외환딜러가 됐다. 김 원장은 3년 만에 여 수석딜러(Chief Dealer) 자리를 꿰찼다. 여자 수석딜러는 해외에서도 보기 드물고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찾기도 어려운 자리다. 당시 딜러로서는 환갑을 훨씬 넘긴 마흔에 430만 달러의 순익을 은행에 안기고 연봉 2억원을 받기도 했다. 이후 중국은행 서울지점의 수석딜러를 거쳐 외환위기 직후에는 외환은행 사외이사를 맡았다. 95년에는 외환딜러 경험을 살려 한국국제금융연수원을 설립했다. 외환.선물.옵션.파생 등 금융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수하고 싶어서다. 당시 우후죽순 생긴 금융 관련 사설 연수원 가운데 지금껏 살아남은 곳은 이곳을 포함해 몇 군데에 불과하다. 2003년에는 한국 금융계 임원급 여성 200여명이 주축이 된 '여성금융인네트워크'를 조직해 회장을 맡고 있다. "한 은행의 인사부장이 해 준 얘기다. 신입사원 공채 때 여성들 점수가 월등히 높다고 한다. 남성 할당량을 정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런데 여자 임원은 얼마나 되나. 올해 처음으로 금융권 여자 CEO(최고경영자)가 나왔다." 금융권에는 여성들이 비교적 많은 것 같다는 말에 김 원장은 현실의 이면을 꼬집었다.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여성 임원을 찾기 힘든 곳이 금융권이다. 김 원장은 그래서 해외처럼 한국도 여성 임원 할당제 등을 정책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여성들이 가사.육아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금융회사들만이라도 공동기금을 만들어 어린이집을 운영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 원장은 여자 후배들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여자들이 끈기가 없다는 것이다. '이만하면 됐지 뭐' 하고 쉽게 포기하는 탓에 '여자들에게는 책임을 맡기면 안 된다'는 편견을 심어준다고 지적했다. 때로는 감정조절을 못 하고 직장 동료나 상사와 언성을 높이거나 눈물을 보여 업무 능력에 비해 저평가받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발로 뛰는 영업과 같은 일보다는 우아해 보이는 기획.마케팅 같은 쪽으로만 일을 하려고 해 조직에서 크는 데 한계가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남자들에 비해 인맥 관리 능력이 떨어진다. 라인이나 동아줄이라고 해서 부정적으로 볼 게 아니다. 조직에서 성공하려면 사람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모든 게 다 사람일 아니냐." 김 원장은 인맥 관리의 '달인'으로 소문나 있다. 신한은행 신상훈 행장과는 신 행장의 차장 시절 처음 만나 지금까지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금융권 인사 뿐 아니라 법무법인태평양 이종욱 공동대표변호사 신경림 시인 등 다양한 인맥을 자랑한다. 김 원장이 95년 '나는 나를 베팅한다'라는 책을 내고 나서 열린 출판기념회에는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인맥 관리에도 요령이 필요하다. 모두와 가족처럼 지낼 순 없다. 속상한 일이 생기면 바로 전화해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한 달에 한 번 얼굴 보면 좋은 사람 1년에 한 번 연하장 보내도 괜찮은 사람 등으로 나눠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도록 한다. 그렇다고 비즈니스를 염두에 두고 계산적으로 사람을 만나라는 얘기는 아니다. 진심은 통하게 돼 있다. 그래서 나는 연하장은 반드시 손으로 쓴다. 사람은 원래 작은 정성에도 감동한다." (실제 김 원장은 기자에게 인터뷰가 끝난 후 딸이 직접 손으로 만든 레진(치과 치료에 사용되는 플라스틱의 일종) 공예품을 건넸다. 확실히 비싼 기념품보다도 기억에 남았다.) 외환시장 전망에 대해서도 물었는데 돌아오는 답변이 심심하다. 외환딜러는 점쟁이가 아니라는 거다. 외환시장을 예측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는 얘기다. 외환딜러들 사이에서는 '시장이 더 현명하다' '누구든 시장을 이길 수 없다' '시장은 항상 옳다' 등의 말이 진리로 통한다고 설명했다. 그런 의미에서 중소기업들이 시장에 대해 지나치게 확신하고 키코(KIKO) 같은 파생상품에 과도하게 가입한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계약 당시 해당 기업의 재무담당 임원이나 CEO는 환율이 예상과 달리 움직이면 큰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텐데도 당장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 손에 들어오는 '공돈'에 끌려 위험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김 원장은 다만 "장기적으로 외환시장은 수급의 문제이기 때문에 한국이 수출을 잘해서 계속 무역수지 흑자를 유지하는 한 달러 가치는 약세를 보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시장 전망과 달리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에 대한 평가에는 단호했다. 현실적으로 개입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이다. "한국 외환시장의 하루 거래량이 480억 달러다. 전 세계 외환시장 규모는 3조 달러다. 거래량이 적으니 한국 외환시장의 변동성이 클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개입해 봐야 어쩌지 못한다. 오히려 전 세계 딜러들에게 돈 벌 기회만 제공하는 꼴이다. 2003~2004년 일본 정부가 수출을 늘리기 위해 엔화 가치를 떨어트리려 재정을 쏟아부었지만 엔화는 오히려 강세를 유지했다. 그렇다고 원화 가치 안정을 위해 다시 고정환율제나 통화바스켓 제도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니냐. 외환시장을 규제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활성화해 시장 규모를 늘려나가는 게 환율 변동성을 줄이는 길이다." 고란 기자

2010-06-17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여성 임원의 리더십-3] 박혜원 온라인투어 대표

대학생 시절부터 사업가 꿈 키워, 주부로 아이 셋 키우다 창업 결심 직원 150명으로 항공권 매출 2100억, 검색·예약 '친절한 시스템'이 비결 WHO 1965년 서울생 진선여고와 이화여대 문헌정보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문헌정보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88년부터 92년까지 SK와 KOTRA에서 직장 생활을 했다. 2000년 온라인투어를 창업해 줄곧 대표이사를 맡고있다. 현재 이 회사 주식 42%를 가진 최대주주다. 경기대 관광경영학과에서 박사 과정도 밟고 있다. 벤처 붐이 한창 불던 2000년 1월 서울 충정로의 작은 사무실. 결혼 후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아이 셋을 키우던 박혜원(당시 35세)씨는 자본금 1억5000만원으로 온라인투어란 '닷컴기업'을 차렸다. 인터넷으로 항공권 등 여행상품을 판매했다. 박씨는 전 직원 다섯 명을 불러 모은 조촐한 개업식에서 야심 찬 비전을 선포했다. "IBM의 하청업체였던 마이크로소프트가 결국 IBM을 넘어섰듯이 우리도 언젠가 세계 정상의 관광.문화기업이 되자." 그로부터 10년 만에 박 대표는 정상을 향한 큰 고비를 넘었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의 '2009년 항공권 매출 순위'에서 온라인투어(2143억원)가 한국 1만여 여행사 중 2위를 차지한 것이다. 이 회사는 2008년까지 하나투어.모두투어에 이어 3위에 머물렀지만 지난해는 모두투어를 제쳤다. 과거 두 배 이상 벌어졌던 1위 하나투어와의 격차도 갈수록 좁혀지고 있다. 직원 수는 10년 동안 150여명으로 늘었고 자본금도 27억5000만원으로 불어났다. 단순히 덩치만 커진 것이 아니라 내실도 탄탄하다. 기술신용보증기금에서 이 회사의 항공권 검색.예약 시스템에 대한 남다른 기술력을 인정해 정보통신진흥기금(18억원)을 지원한 것을 제외하면 무차입 경영을 하고 있다. 경기에 민감한 여행업의 특성에 따라 적자를 본 해도 있었지만 흑자를 더 많이 낸 덕분에 회사 통장에는 이익잉여금(19억원 지난해 3월 결산 기준)이 잔뜩 쌓여 있다. 박혜원(45) 대표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여행업 전체가 휘청거리는 상황에서 단 한 번의 감원.감봉 없이 이뤄 낸 성과라 더욱 값지다"고 말했다. 그는 "10년 동안 무수히 많은 여행사가 생겼다 사라지는 것을 봤다. 원천기술을 갖고 끊임없는 기술 혁신을 하면서 100년 200년을 가는 영속적 기업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비전"이라고 설명했다. 여행업계 최초 벤처기업 인증받아 -창업 10년 만에 업계 2위라니 대성공이라 할 만하다. 비결은 뭔가. "첫째도 기술력 둘째도 기술력 셋째도 기술력이다. 경쟁사는 직원이 1500명인데 우리는 150명이다. 그런데 항공권 매출은 우리가 약간 많다. 1인당 생산성으로 따지면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우리 기술력의 핵심은 '영화 예매보다 간편한' 실시간 항공권.호텔 검색 및 예약 시스템이다. 24시간 자동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직원들이 고객에게 일일이 응대하지 않아도 된다. 자체 기술연구소를 운영하면서 관련 특허도 여러 건을 출원했다. 창업 당시부터 기술력으로 승부를 걸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각오가 있었다. 기술력은 우리 같은 벤처기업의 생명이다."(온라인투어는 2001년 여행업계 최초로 중소기업청에서 벤처기업 인증을 받았다.) -여행사의 항공권 예약 시스템은 서로 비슷하지 않나. "그렇지 않다. 사이트에 들어온 고객이 기본 정보를 입력하는 순간부터 최종 항공권 발권까지 과정을 8단계로 줄였다. 경쟁사는 최대 25단계다. 한 번 맛을 본 고객이 계속 우리를 찾아올 수밖에 없다. 다른 여행사는 자체 기술로 시스템을 개발하기보다 외주를 주거나 링크를 걸어 놓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원천기술을 갖고 있으니 제2 제3의 진화한 시스템을 개발하는 게 가능하다. 게다가 항공사 홈페이지에는 없는 저렴한 요금까지 제시하니 금상첨화다." -요금은 얼마나 싼가. "영업 비밀이라 밝힐 수 없다(웃음). 분명한 사실은 가격 경쟁력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매출이 많아지면 항공사와 가격 협상력이 커진다. 그러면 다른 여행사보다 유리한 요금을 받아 올 수 있다. 매출 극대화에 전력을 기울이는 이유다." 내년 하반기 해외 진출 구상도 -가정주부가 창업을 결심한 이유는. 그전에는 무슨 일을 했나. "대학생 시절부터 사업가가 꿈이었다. 졸업 후 대기업(SK)과 공기업(KOTRA)에서 잠시 일했다. 전공이 문헌정보학이라 해외 정보 등을 수집.가공하는 일이었다. 좋은 경험이었지만 직장 생활에 대한 한계도 많이 느꼈다. 특히 큰 조직에서는 열심히 일한 개인이 충분히 보상받지 못하는 것을 자주 봤다." -창업 아이템으로 다른 것도 많았을 텐데 왜 여행업을 선택했나. "1994년 첫 해외여행으로 런던에 갔다가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조금 더 일찍 외국을 봤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컸다. 그 후 유럽에선 가 보지 않은 나라가 없을 정도로 구석구석 다 돌아다녔다. 벤처 붐이 일었을 때 정보기술(IT)과 접목해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분야가 어디일지 고민했다. 그랬더니 여행업이란 결론이 나오더라. 여행상품은 일부 패키지 관광을 제외하고 품질의 차이가 크지 않다. 관건은 서비스인데 '친절한 직원'을 많이 두진 못해도 '친절한 시스템'에는 자신 있었다." -초창기에는 어려움도 많았을 텐데. "사무실을 구하고 집기를 들여놓는 것에서부터 직원을 뽑고 법인 설립 등기를 하는 것까지 법무사나 대행업체에 맡기지 않고 전부 직접 했다. 전화도 받고 티켓도 끊고 1인 10역을 한 것 같다. 항공사에 갔다가 명함도 내밀지 못하고 문전박대당한 적도 많다. 그래도 용기를 잃지 않고 열심히 뛰어다녔더니 차츰 인정을 받고 모양새도 갖춰 나갔다. 올해로 45세인데 솔직히 내 나이가 낯설게 느껴진다. 아직도 마음은 10년 전 그대로다." -여행업은 경기에 따라 부침이 심한 업종이다. 위기는 없었나. "왜 없었겠나. 최근 '위기가 닥치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투명성이다'는 글을 읽었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설립 첫해부터 외부 회계감사를 받았다. 부실을 숨기거나 우회상장 등으로 한눈을 팔지 않았다. 회사가 잠시 어렵다고 월급을 깎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직원들의 확실한 믿음을 얻고 비전을 공유하려 노력했다. 또 중요한 것은 끊임없는 기술 혁신이다. 혁신이 없으면 제자리에 머물고 그것은 곧 퇴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증시에 상장할 계획은 없나. "사실 2006년에 상장을 추진하다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해 중단한 적이 있다. 아직 구체적 시기는 말하기 어렵지만 언젠가는 상장할 계획이다. 한 가지 분명한 원칙이 있다. 상장을 통해 직원들이 열심히 일한 데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상장으로 대주주나 회사만 돈을 번다고 하면 직원들은 커다란 상실감을 느낀다. 상장 차익을 보고 돈을 싸들고 와 투자하겠다는 제안이 많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실제로 상장 후 휘청거리는 회사를 많이 봤다." -해외 진출 계획도 있나. 세계 정상의 관광.문화기업을 목표로 한다고 했는데. "내년 하반기 정도에 일본.중국.동남아에 현지 법인을 세운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생각보다 시기가 빨라질 수도 있다. 해외에서 온라인 기반으로 영업하기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가격 경쟁력이 있고 번역 시스템을 잘 구축하면 중국 사람이 미국으로 가는 항공권도 우리에게 와서 사 갈 것이다. 현재는 한국 관광객을 해외로 내보내는 아웃바운드 영업을 하지만 앞으로는 외국 관광객을 한국으로 불러오는 인바운드 영업도 할 것이다." 주정완 기자

2010-06-03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여성 임원의 리더십-2] 설금희 LG CNS 상무

설금희(49) LG CNS 상무는 대기업 1세대 여성 임원의 대표 주자다. 1983년 금성사(현재 LG전자)에 공채로 들어가 21년 만인 2004년 상무로 승진했다. 금성사에서 대졸 여성 엔지니어는 설 상무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화려한 경력의 외부 영입파가 아닌 신입사원으로 밑바닥에서 시작해 오직 땀과 실력으로 과장·차장·부장을 거치며 ‘유리 천장’을 깬 흔치 않은 경우다. 회사 생활 21년 만에 상무로 승진한 대기업 여성 임원 1세대 대표 주자 도전하는 열정과 부지런함으로 차세대 리더 키우는 멘토로 앞장서 부하 직원들에게 '따뜻한 카리스마'로 존경받는 설 상무는 자신의 경험을 회사 안팎의 후배들에게 나눠주는 일에도 관심이 많다. 그중 하나가 여성 임원들의 모임인 WIN(Women in Innovation 회장 손병옥 프루덴셜생명 부사장)에서 '멘토링(Mentoring)'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멘토링은 고대 그리스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나가며 가장 신뢰하는 친구였던 멘토에게 아들의 교육을 맡긴 것에서 유래했다. 현대에 와선 경험과 지식이 풍부한 선배가 애정 어린 지원과 충고로 후배의 성장을 이끌어주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멘토의 지도와 교육을 받는 상대는 멘티라고 한다. WIN에서 인연을 맺은 설 상무의 멘티는 외국계 기업 파맥스오길비헬스월드의 곽유정(33) 차장이다. 두 사람은 지난 8일 오후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만나 '여성 임원의 리더십'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70여개 업체의 120여명 회원이 참여하는 WIN은 24일 오후 코엑스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차세대 여성 리더 컨퍼런스'를 연다. 이 자리에선 미래의 임원을 꿈꾸는 젊은 여성 직장인과 현직 여성 임원들의 멘토링 결연이 이뤄질 예정이다. -곽유정 차장(이하 곽): 지난해 5월 WIN 컨퍼런스에서 멘토-멘티로 인연을 맺은 지 벌써 1년이 됐네요. 여성 임원이 드문 한국 대기업에서 더구나 컴퓨터 시스템 엔지니어로 전문성을 인정받고 목표를 이룬 선배를 보고 처음엔 수퍼우먼인 줄 알았어요. -설금희 상무(이하 설): 이화여대 경영학과 4학년 때 진로를 고민하다 학교 앞 전산학원에 다닌 게 이쪽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가 됐지. 같이 입사한 동기 100여 명 가운데 나 말고도 여성이 10명 정도 있었는데 지금은 다 그만두고 혼자 남았어. 전사적자원관리(ERP) 시스템을 도입해 고객사에 구축하고 운영하는 서비스를 주로 했어. 컴퓨터 하면 공대 출신 남성이 유리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어. 시스템을 개발하는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교함이거든. 정확하고 섬세하게 일처리를 하는 여성이 상대적으로 강점이 있어. -곽: 저는 중앙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2001년 직장 생활을 시작했어요. 론스타.맥쿼리코리아 등 금융계를 거쳐 지난해 3월 현재의 회사로 옮겼어요. 제약.헬스케어(건강관리) 분야에서 홍보.광고.교육.컨설팅 등 전방위 서비스를 하는 곳이죠. 인적자원(HR) 담당 팀장을 맡고 있는데 이 분야에서 쭉 전문성을 키우고 싶어요. -설: 나도 인사 담당 임원을 딱 1년 해봤는데 무척 행복했어. 학연이나 지연에 덜 얽매이고 최대한 공평하게 사람들을 대하려 한다는 점에서 여성이 유리한 분야지. 외국계 회사에서 HR 임원이 대부분 여성인 것도 그런 이유일 거야. 명심할 점은 인사 담당은 두 얼굴을 가져야 해. 하나는 사원의 입장 다른 하나는 최고경영자(CEO)의 입장이지. 사원들을 위한 제도를 도입하면 그들도 행복해 하고 나도 일하는 보람을 느끼지. 하지만 중.장기적으로 회사에 무엇이 필요한지도 잊지 말아야 해. -곽: 저도 선배처럼 언젠가 임원이 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설: HR은 여성이 전문성을 살리기 좋은 분야지. 잘한 선택인 것 같아. 대학원(중앙대 인적자원개발대학원)에서 전문지식도 쌓았다고 했지. 직장생활에서 성공하는 비결은 여자나 남자나 똑같아. 첫째는 일을 즐기고 둘째는 상사와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해. 아부하라는 게 아니라 상사와 원만한 의사소통이 아주 중요하다는 얘기야. 셋째는 체력이야. 건강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부지런함과 꼼꼼한 시간관리도 필수야. 나는 과장 시절에도 '시간관리는 설 과장을 배워라'는 소리를 들었어. -곽: 여자라서 힘들었던 경험은 없었나요. 어떻게 이겨냈나요. -설: 부장 시절에 프로젝트 매니저(PM)를 맡아 고객사에 갔는데 "전산실 직원도 접대 자리에 참석하고 사우나도 따라가야 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나는 못한다. 하지만 조직으로 해결하겠다"고 했지. 내 밑에 남자 후배들이 많았거든.(웃음) 사우나까지는 아니라도 무슨 일이든 적극적으로 도전해 보겠다는 열정이 필요해. LG그룹에 여성 임원이 10여명 있는데 신입사원으로 들어온 사람은 나를 포함해 6명이야. 외국계 회사보다 한국 대기업에 여성 임원이 적은 게 현실이지만 앞으로는 문이 활짝 열릴 거야. -곽: 결혼한 지 2년 됐는데 아직 아이가 없어요. 솔직히 출산이 부담스러워요. -설: 회사일과 집안일을 다 잘하는 수퍼우먼은 없어. '육아도 아웃소싱'이 필요해. 주변의 도움을 최대한 받으라는 거지. 나도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도움과 희생 덕분에 두 아이를 키웠어. '워킹맘(일하는 엄마)'이라면 누구에게나 육아는 힘들어. 고민이 있더라도 덮어두면 안 돼. 혹시 일 때문에 늦게 애를 갖겠다면 절대 반대야. 빨리 낳고 빨리 키워야 일도 제대로 할 수 있어. -곽: 팀원 시절에는 일만 열심히 하면 됐지만 이제는 팀장이니까 리더십을 고민하게 돼요. -설: 내 사무실에 액자가 하나 있는데 '사랑'이라고 쓰여 있어. 리더십의 바탕에는 사랑이 반드시 깔려 있어야 해. 그 다음은 경청이야. 지위가 올라가다 보면 듣기보다 말하기를 좋아하는데 그러면 안 돼. 잘 듣는 일이 정말 중요해. 우리 회사는 사내 통신망에 블로그가 활성화돼 있어. 직원들과 간담회나 대화를 하면 그걸로 마는 게 아니라 반드시 피드백을 블로그에 남기지. "당신의 꿈이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직원들에게 "상무님 감동했어요"하는 피드백을 받기도 하지. 진심이 통하는 교감이 리더십의 요체라고 생각해. 물론 일에 대한 전문성은 기본이지. 주정완 기자

2010-05-20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여성 임원의 리더십-1] 김혜경 풀무원건강생활 부사장

보이지 않는 차별을 뜻하는 ‘유리 천장(Glass Ceiling)’은 그만큼 견고하다. 그러나 영원히 깨지지 않는 유리도 없다. 어렵고 힘든 과정이었지만 유리 천장을 깨고 당당한 리더로 올라선 여성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직장 생활에서 난관에 부닥칠 때마다 피하기보다 도전과 열정으로 정면 승부를 택했다. 치열한 승부의 현장에서 만난 여성 임원·CEO(최고경영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시리즈로 소개한다. 한국 최초 유기농 브랜드 '올가'…입사 3년 만에 CEO 맡아 성공 과로로 쓰러져 세 차례 대수술…오뚝이 처럼 일어나 일에 매진 "회사가 저를 뽑은 게 아니라 제가 이 회사를 고른 것입니다. 일단 관찰해 보고 마음에 들면 남겠습니다." 1993년 풀무원에 입사한 36세 경력사원 김혜경씨의 소감은 당차고 오만했다. 그녀의 패기와 도전정신을 높이 산 남승우 풀무원 사장은 3년 뒤 유기농 유통사업 진출이란 과제를 과감히 맡겼다. 유기농의 개념조차 낯설던 시절 그녀는 밤낮없이 현장을 누비며 한국 기업 최초의 유기농 브랜드 '올가'를 성공시켰다.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자 외부 투자를 유치해 '올가홀푸드'란 회사를 세우고 CEO를 맡았다. 이후에도 '내추럴하우스 오가닉(건강식품)' '풀비타(비타민)' '베이비밀(이유식)' 등 풀무원의 신규 사업에는 항상 그녀가 있었다. 현재는 풀무원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풀무원건강생활의 부사장 겸 전략기획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종합 식품그룹인 풀무원은 지난해 매출액 1조1204억원(연결 기준)을 기록하며 '1조 클럽'에 입성했다. 김혜경(53) 부사장은 "남들이 두려워하거나 하기 싫어하는 일을 맡으면 오히려 힘이 솟는다. 무슨 일을 맡든지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인가 해서 가치 있는 일인가를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기업으로서 매출이나 이윤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가치는 '건강한 사회 만들기'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며 "은퇴 후 체력이 허락한다면 환경 관련 단체나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싶다"고 덧붙였다. 김 부사장은 충북 괴산의 풀무원 연수원 '로하스아카데미' 본부장도 맡아 서울과 괴산을 수시로 오가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36세에 경력사원으로 풀무원 입사 -회사 생활을 남보다 늦은 나이에 시작했다. "30대 중반의 어중간한 나이였지만 일단 결심이 서면 앞뒤 재지 않고 돌진하는 기질이 발동했다. 캐나다에서 돌아와 전에 근무하던 학교로 복직도 가능했지만 공백기간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침 풀무원에서 경력사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공(식품영양학)이나 관심 분야도 맞아 지원했다. 집은 대전인데 입사 1년쯤 지나자 서울로 발령이 났다. KTX도 없던 시절이라 서울에서 대전을 매일 차를 몰고 출퇴근했다. 회사에서 집에 오면 오후 10~11시였지만 다음 날 오전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집을 나섰다." -유기농 유통사업은 어떻게 진출하게 됐나. "96년 어느 날 남승우 사장께서 불렀다. 난데없이 유기농 유통사업을 해보라기에 사흘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식품 제조회사가 유통업에 진출한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이틀째 되는 날 '해보겠습니다'고 답했다. 당시 나에겐 두 가지 꿈이 있었다. 첫째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식탁에도 유기농 야채를 올리는 것이었다. 둘째는 항생제를 없애고 그 자리를 비타민.미네랄 등으로 채우는 것이었다. 이건 시간이 흐른 뒤 풀비타 사업으로 가시화됐다." -90년대 중반이면 사회적 인식이 부족한 상황에서 유기농 사업이 쉽지 않았을텐데. "책으로 쓰라면 몇 권이 나올 거다. 시민단체나 사단법인이 아닌 기업 차원의 유기농 유통은 처음이었다. '유기농이 왜 무농약보다 비싸냐' 등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비난도 많이 받았다. 생산 관리에서 홍보까지 전 과정을 다 책임져야만 했다. 생산자.소비자가 있는 곳이면 강원도 산골이나 제주도나 가리지 않고 찾아갔다. 지금처럼 컴퓨터 장비가 발달한 것도 아니어서 화이트보드를 차에 싣고 전국 매장을 돌아다니며 밤늦게까지 직원 교육을 시켰다. 집에는 옷만 갈아입고 다시 나오다시피 했다. 주 100시간을 넘게 일했다. 나중에 차량 계기판을 보니 연간 주행거리가 10만㎞를 넘었더라." -실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없었나. "캐나다에 살았던 경험으로 우리나라도 소득이 높아질수록 유기농이 대세가 될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사람들이 건강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건강한 어린이는 우리의 미래" -다른 사람 건강 위하다가 자신의 건강을 해친 것 아닌가. "무리하다 건강을 해친 탓에 갑자기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가는 일이 잦았다. 무슨 일이나 끝장을 보는 성격 때문이다. 대수술을 세 번이나 받고 살아났다. 2003년 세 번째 수술을 받고 나선 한동안 회복이 되지 않았다. 남승우 사장이 주주총회를 연기해 가면서 복귀를 기다려줬다. 하지만 계속 회복이 늦어져 2004년 9월 건강생활부문으로 옮겼다." -남승우 사장이 풀무원의 '엔트러프러너(Entrepreneur.기업가)'라고 평가한다던데. "복귀 후 처음엔 쉬라더니 일을 잔뜩 주더라(웃음). 어차피 내 성격이 가만히 앉아있질 못한다. 2005년 내추럴하우스 오가닉이란 프랜차이즈 사업과 굿다이어트란 인터넷 사업 정리를 맡았다. 한두 달 사업 구조를 들여다보니 '악' 소리가 났다. 프랜차이즈는 가맹점을 관리하는 정보기술(IT) 시스템이 핵심인데 그게 제대로 안 돼 있었다. 할 수 없이 전공도 아닌 IT 시스템 구축에 전력을 기울였다. 아무리 뛰어난 프로그래머라도 사업 구조를 잘 모를 수 있다. 그걸 완성해주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었다. 참 재미있었다." -지난해부터는 '로하스 아카데미'도 맡았는데 뭐하는 곳인가. "자연을 체험하는 곳이다. 일반적인 기업 연수원은 지식이나 가치를 주입하려고 한다. 우리는 숲속 아늑한 곳에서 쉬면서 자신을 비우고 자연을 담아가도록 권한다. 그게 풀무원의 정신이다. 명상.요가와 숲길 걷기 영농 체험 등으로 프로그램을 짰다. 일단 들어오면 휴대전화도 맡기고 업무와 스트레스에서 완전히 벗어나도록 했다." -올해 초에 이유식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어린이는 우리의 미래다. 어릴 때부터 건강한 먹을거리를 줘야 평생의 기초가 된다. 그런데 요즘 엄마들은 시간도 없고 정보도 부족하다. 그래서 우리가 아기의 월령에 맞게 여러 가지 메뉴의 이유식을 만들어 냉장 상태로 배달하는 것이다. 초기 반응은 매우 좋은데 가격이 비싸 부담스럽다는 분이 많다. 현재 24~36개월 아기를 위한 음식도 준비 중이다." WHO? 1957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한양대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결혼 후 남편을 따라 캐나다로 건너가 아르바이트 건강 상담사로 일했다. 당시 캐나다의 선진화된 유기농·건강식품 시장과 시스템을 보고 큰 감명을 받고 미래 사업의 비전을 읽었다고 한다. 귀구 후 93년 풀무원에 입사해 신규 사업 진출 때마다 중요한 역할을 했다. 97년 설립한 유기농 농산물 유통업체 올가홀푸드에서 10년간 대표이사를 맡았다. 회사 생활 틈틈이 한양대 대학원에서 임상영양학을 공부해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올 초에는 조리를 마친 상태에서 냉장 배달하는 이유식 브랜드 ‘베이비밀’도 출시했다. 현재는 사내 연수원 ‘로하스 아카데미’ 본부장으로 친환경 청소년 수련원 건립 사업에 매진하고 있다. 주정완 기자

2010-05-13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